행정기본절차법의 제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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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 9개월간 실시된 정부의 법령 정비작업 결과 행정각부처가 법령 개폐에 있어 국민의 편의보다 행정의 편의를 우선하고, 국민의 권리·의무를 법령의 근거 없이 행정규칙 등으로 규제하는 사례가 허다함이 드러났다.
이러한 행정의 남용을 규제하는 방안으로 대민 관계 행정법령 정비위는 구랍 행정기본절차법의 제정과 행정법령 정비위의 상설화를 건의했었다.
법령의 근거 없이 국민의 권리·의무가 규제될 수 없음은 헌법에 명문으로 보장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규제입법도 국가 안보와 질서유지 및 공공복리에 필요한 경우로만 국한되어 있다. 이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은 적을수록 좋다는 정신의 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법 현실은 이 정신과는 너무 유리된 것 같다. 국회가 열릴 때마다 홍수처럼 법이 양산되는 통에 일반 국민은 고사하고, 비교적 법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 사람들까지도 그 내용을 일일이 알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는 법의 안정성을 해치는 요인일 뿐 아니라 선량한 국민을 본의 아닌 범법자로 만드는 수가 많다.
이토록 바람직하지 못한 법의 양산이 그나마 단순한 행정이나 단속의 편의 때문에 조장되고 있다니 한심한 노릇이다. 또한 도덕적으로 규탄돼야 할 형사벌과 단순히 법으로 정했기 때문에 처벌되는 행정벌의 구별 없이 일률적으로 처벌만 강화하기 위한 법개정도 깊이 생각해 볼일이다. 더구나 법의 양산에도 불구하고, 법률의 근거 없이 국민의 권리·의무를 각종 행정규칙으로 규제한다면 이는 법치주의 정신을 손상하는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행정력 또는 운영의 묘란 이름의 국민의 권리 제약을 적지 않게 보아 왔다. 우선 규제해 놓고 필요하다면 사후에 법을 고치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법의 지배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회복되긴 어렵다.
이러한 행정법령 운영상의 여러 문젯점을 뒤늦게나마 정부 당국이 개선하려는 노력을 보인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행정법령 정비위가 고쳐져야 한다고 지적한 문젯점은 대충 소수의 나쁜 사례 때문에 전체를 규제하려 한 것, 행정의 단속 측면만을 강조한 것, 공무원의 편의와 책임 회피를 위해 절차와 방법을 복잡하게 한 것, 법률간의 벌칙 및 형량의 불균형 등이다. 지적된 문젯점은 대개 국민들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것들이다.
이렇게 정부가 일단 문제의 소재를 파악한 이상 이를 개선하는데 시간을 끌 필요는 없다고 본다. 가능한 한 빨리, 늦어도 올해 안에는 이같은 행정법령상의 부조리가 일소되었으면 하는게 우리의 희망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부가 제정을 검토 중인 행정기본절차법은 행정의 기준을 세운다는 점에서 전진적 발상인 것 같다. 행정절차법은 행정기관의 규칙제정·쟁송재결·행정처분 등의 경우에 준거할 절차를 규정하는 법이다.
정부의 구상이 미국식의 준 사법적 행정절차에 한정된 것인지, 또는 모든 행정행위의 준거 기준이 될 기본법을 마련하려는 것인지는 아직 분명치가 않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라도 국민의 권리·의무에 대한 행정규제를 통제하고 현재의 다기한 행정법령 체계를 정비해야 할 요청이 큰 만큼 그 필요성은 있다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행정절차법의 제정만으로 행정법령의 고질적 여러 문젯점이 쉽게 해결되리라고 본다면 너무 안이한 생각이다. 행정절차법이란 행정행위의 기본법이 제정되더라도 다른 법령에 의해 허다한 특례가 생겨난다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결국 행정법령의 정비도 법 제도적 문제이기 전에 행정의 풍토와 공무원의 의식수준의 쇄신과 비례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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