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위사」로 인간의 척도 다시 찾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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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근자에 사회의 기풍이 어지러워진 것을 걱정하는 논의들이 분분하다. 인간의 바탕을 지탱해주는 도덕과 윤리가 빛을 잃고 제구실을 못한다는 개탄이기도 하다. 뒤늦게나마 그런 논의가 일고 있는 것은 오히려 다행하고 반가운 일이다.

<빚 잃어 가는 도덕윤리>
법사의 문정에 몸담고 있는한 사람으로 가까이는 교단을 보나, 그 너머 속세를 보나 마음이 무겁기는 매한가지다. 「이계위사」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속기가 분분한 불가의 뜰이나, 인간의 참모습들을 잃어 가는 저 속세나 도무지 침울하기만 하다.
이 세상은 인간들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거늘, 어찌하여 그런 흐뭇한 인간의 향기들이 무산되어 가는지 한심스럽다.
원래 불교는 부처님의 제일 게에 나타나 있는 대로 『약인욕료지삼세절불 응관법계성 일절유심조』를 교리로 하여 모든 것이 인간의 마음에서 생성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인간의 마음이란 덕성의 소산이며, 또 그것은 우주만상의 사상적인 근원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비롯되지 않는 마음은 곧 사요 악이요 이기인 것이다. 요즘은 그것을 물질의 사상이라고도 한다. 모든 가치를 인간의 척도로 가늠하지 아니하고 물질의 그것으로 재어보고 평가하려는 사상은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다.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바로 인간 아닌 물질을 주체로 맞아들이려는 생각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일이다. 부끄럽고, 애처롭고 딱하기만 하다.

<가치를 물질로 가름>
근래에 「정신혁명」이니 「인간개조」니 하는 말들을 하지만, 그것은 인간을 다시 만들거나 뒤집자는 뜻이 아니라 「제마음」으로 되돌아가자는 뜻일 것이다. 이것은 바로 불가의 가르침과도 상통한다.
우리는 어차피 「대중」의 조직 속에 살고 있으니, 그 계를 지키고, 인간본연의 마음가짐인 덕성을 간직하는 것은 곧 내가 정화하고, 내가 속해있는 세상이 정화되는 길이다.
일찌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제자들이 불가의 앞날을 걱정하며 이런 애소를 한 일이 있었다. 다름 아니라 대자 대비하신 부처님께서 재세하실 때도 일부 악성 비구들이 교단을 어지럽혔거늘, 부처님 열반하신 후 이 같은 무리들을 통솔할 방법이 없으니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를 여쭈어 본 것이다.
부처님은 한마디로 유촉 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설한 계를 준수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도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이계위사하라』고 하셨다.

<덕목에 집착 시비 잦아>
『계로써 스승을 삼으라』는 뜻은 다만 강령과 법조문을 잘 지켜야한다는 좁은 뜻만을 함축하기보다는 인간의 본성이기도한 덕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큰 뜻으로 새겨들을 만도 하다.
교단에서는 위 계승을, 세속에서는 위법자를 오로지 지탄하고 축출하는 것만으로는 「이계위사」의 전부가 아닐듯하다. 그 무엇보다도 인간을 덕성의 가운데에 머무르게 하고 또 끌어들이는 일이야말로 너나 없이 모든 사람의 과업이다. 덕성이란 어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고 나의 한가운데에 있다.
곧 내가 덕성을 값있게 간직하면, 나와 더불어 이웃한 남도 그 인연으로 감화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웃과 이웃의 어울림은 곧 이 세상을 밝은 인간의 미소로 넘치게 하며, 흐뭇한 마음으로 화합을 이루게 할 것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덕목에만 집착해 서로 헐뜯고 시비하고 손가락질을 즐겨한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고향인 덕성으로 되돌아가는 일이야말로 오늘의 세상을 굳건히 지켜주고 밝게 열어주는 길이 될 것이다. 【김서운 스님<양주흥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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