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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의 호스트 등소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작달막하고 근엄한 모습에 줄담배를 피워 대는 등소평은 현재 서열 제3위의 지도자이지만 사실상 중공의 최고위 행정가이다.
군총참모장직을 경하고 있는 등소평의 권력은 당과 군부의 최고위층에 두루 뻗쳐 있으며 그는 일반적으로 주은내 수상의 가장 논리적인 후계자로 간주되고 있다.
주은내가 병상에 누워 매일 몇 건의 서류밖에 처리할 수 없게 됨에 따라 71세의 등소평이 대부분의 국사를 이미 떠맡았다.
그러나 불과 3년 전만해도 그는 거의 잊혀진 인물이었다. 그는 67년 소란하던 문화혁명이 절정에 달했을 때 숙청됐었다.
과격파 홍위병들은 당시 당총서기였던 등이 모택동 사상을 반대하고 있다고 규탄하고 그를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자』, 배반자, 복수 간첩, 반혁명 수정주의자라고 몰아세웠다.
심지어 그의 유명한 「브리지」(「카드」놀이의 일종) 솜씨까지 비난의 대상이 되어 홍위병들은 그가 「카드」놀이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비난했었다.
그후 6년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한때는 그가 자살을 기도했다는 보도들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73년 4월 등소평은 북경의 인민대회전의 공식 연회에 다시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극적으로 복권했다.
그의 승진을 가져온 큰 원인은 그의 탁월한 행정 능력이다. 중공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그가 온순하고 기억력이 뛰어나며 「유머」가 거의 없고 그가 이끄는 모든 중공대표단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 서부의 산악 지대인 사천성 태생이며 주은내를 포함한 다른 좌익 청년들과 함께 1920년대에 「프랑스」에 유학했다.
오랜 중국공산당의 투쟁 기간중 등은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모택동과 강서 「소비에트」에 가담했고 군 기관지 『적성』을 편집했으며 유명한 『장정』에 참가했다. 56년까지에는 부수상겸 당총서기가 되었다. 【로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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