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등산 5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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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인수봉을 등반한 그 이듬해인 31년 봄 도봉산 만장봉(해발 701m)을 처음으로 올라갔다.
북한산에 갈때마다 건너다본 도봉연봉은 덩치 큰 북한산과는 대조적으로 톱날처럼 우뚝우뚝솟은 기암의 절경이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다음차례로 꼭 가고 싶었던 것이다.
산세가 워낙 웅장하여 이태조가 서울에 도읍을 정할때 그 영기에 사로잡혔다는 설이 있기도 하지만 기운차고 변화무쌍한 기복과 굴곡이 압축되어있는 형상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번에는 같은 나이의 이종동생(이봉구)과 단둘이었다. 장비라고는 역시 길이 20m의 누런 밧줄 하나뿐.
천축사뒤 비탈을 타고 올라 당초엔 선인봉을 목표로 한것이 높은곳만 쫓다보니 만장봉을 오르게 되었다. 초행「코스」로선 까다로운 4m직벽등 장애가 많았으나 섬세하고 변화많은 바위오름에 짜릿한 재미가 그치질 않아 토끼모양 뛰어올랐다. 까마득한 의정부, 수낙산과 불암산, 그리고 도봉의 산자락을 내려다보는 정상 암두의 두 소년은 점심을 가르고도 배고픔을 잊은채 그저 즐겁고 흐뭇했다.
그런데 하산때 그만 사고가 났다. 동생이 추락한 것이다.
오를때의 벼랑이 복잡한듯해서 반대편의 시원한 벽을 하산「코스」로 잡은 것이 실수였다. 이곳은 어마어마한 낭떠러지로 만장봉 동쪽 암벽이었다.
「자일」을 반으로 걸고 10m씩 타고 내려갔는데 줄을 가랭이-가슴-어깨로 돌리는「듈퍼」(어깨앞걸이) 식 밧줄 타기법을 그때까지는 몰랐기 때문에 줄을 등뒤로만 걸친채 마구잡이로 붙잡고 하강하던중 먼저 내려간 동생이 턱바위에 걸려 발버둥치다 떨어지고 말았다.
동생은 약10m아래 조개껍질같이 벌어진 칼날 바위속에 피투성이가 되어 쳐박혀 있었다.
불행중 다행인지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무릎을 크게 다쳤다. 운신을 못하는 부상자를 업고 2백여m나 되는 벼랑을 기어내려와 기진맥진하여 천축사에 당도했을땐 캄캄한 새벽3시였다. 우리가 정상에 올랐을때가 낮12시께. 실로 약15시간 동안의 이 처절한 사투는 15세의 나이로선 너무나 무서운 악몽이었다. 젊은 보살 한분이 기겁을 하며 된장덩어리로 상처를 응급치료해 주었다.
이 사고로 인해서 집안 어른들로부터 치도곤을 맞은 것은 물론, 나는 당분간 산을 갈수가없었고 40여일동안 동생을 업고 학교에 다니는 곤욕을 치렀다.
산행금족령을 받은 나는 그래도 산을 잊을 수 없어 설레는 마음음 산악서적 탐독으로 달랬다. 도서관엘 개근하다시피 다녔는데 학교시험 기간중에도 「드·소슈르」의 「몽블랑」등산』이나 「에드워드·워퍼」의 『「마터호른」등반기』등에 더 열중했다. 이 시절에 나는 등산사에서부터 등목구삼의 『암등술』 (1925년판)등 등산서적이라면 닥치는대로 읽었다. 이로써 산에대한 동경은 더욱 불탔고 등산지식도 크게 늘었다. 만장봉에서의 추락사고가 나의 등산일생중 지금까지 최초이자 최후의 사고로 남게된것은 아마 이때의 공부와 정신수련의 결과라 믿어진다.
이렇게 한 1년남짓 지내다가 나는 다시 슬금슬금 산을 찾기 시작했다. 집안에서도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나는 가능한한 몰래 다니려고 애썼다. 자연히 단독산행을 하게되었다. 단독산행은 이때의 심정으로선 남의 위험을 염려할 필요가 없고-나 자신에 대해선 자신만만했으니까-쓸데없이 수작하는 상대가 없어 홀가분하기도 했다.
홀로 산을 방황하는 짓을 약1년간(1933년)계속했다. 이 동안에 백운대·인수봉은 물론이고 만장봉의 남·서 두「코스」를 되풀이 답사했고 오봉도 모조리 정복했다.
나의 단독산행 1년을 끝나게 한 것은 주봉, 그리고 나에게 오랜 등산「파트너」엄흥섭군을 소개시켜 추었다. 엄군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등산화와「스키」화를 수공으로 만든 제화기술자로 왕봉 아래에서 우연히 만나 떨어질수없는 지기가 되었다. 우리는 너무나 손발이 잘 맞아 하늘이 맺어준 산우가 된것이다. <계속>
▲정정=작일 본난 제목과 내용중 이강공은 「이강공」의 잘못이옵기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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