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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레진저」의 퇴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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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어쩌면 국방장관으로 최적임자』(타임 지)라는 중평을 듣고 있던 「슐레진저」가 그 자리를 물러났다. 특히 한국정세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시원시원한 발언을 해오던 미 국방장관이고 보면 어딘지 서운한 느낌마저 갖게 한다.
그는 『여차하면 평양의 심장부를 때려부수겠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았었다. 한마디로 전략에 관한 한 「독수리」였다. 「키신저」장관도 언젠가 그를 「헌터·호크」(독수리사냥꾼)라고 부른 일이 있었다. 「슐레진저」와 「키신저」의 감정은 별로 원만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인간적으로 담을 쌓고 지낸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정책의 면에서는 「독수리」와 「비둘기」의 차이를 보여 주었다.
미국의 외교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키신저」의 구상은 「데탕트」(화해)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세계정치의 주축인 미국과 소련은 SALT(전략무기제한회담)를 통해 서로 평화공존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키신저」는 지금의 핵능력으로도 전인류의 몇 갑절을 살육할 수 있는 위력이 있는데 『그까짓 핵탄두를 한 두개 더 갖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슐레진저」의 구상은 좀 다르다. SALT란 미국의 일방적인 양보만 강요당하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럽」의 NATO가 약화하고 결과적으로 미국의 방위력마저 약화한다고 「슐레진저」는 생각한다. 그는 SALT를 지연시키면서라도 힘의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슐레진저」는 「키신저」를 「외교기술자」(디플로머티스트)라고 비꼰 일도 있었다.
정치「업저버」들은 이런 시비를 보면서도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외교란 강·약의 박자를 가져야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고전적인 평가를 했었다.
그러나 「포드」대통령은 결국 「비둘기」와 「독수리」의 양자택일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 같다. 미국의 정치는 흔히 「선거의 정치」라고 말한다. 『모든 길은 선거로 통하는』 정치를 하기 때문이다. 필경 「슐레진저」의 퇴진도 명년의 대통령선거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SALT의 타결은 「포드」행정부가 바라는 일이며, 그 성취를 위해서는 「키신저」가 더 필요했을 것이다.
「덕치」의 눈으로 보면 그런 일들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지만 『기술의 정치』에서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기술의 정치」는 방정식과도 같은 구조를 전제로 하고있다. 그 구조를 삐끗하게 만든 요소는 여러 모에서 불경한 존재다.
유일한 민간인 출신으로 더구나 「하버드」 「그룹」의 일원인 「슐레진저」의 매력도 정치의 냉혹한 현실에선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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