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일제 징용 배상소송 … 시진핑 정부가 사실상 주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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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된 중국인 노동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중국 법원이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과거 징용 노동자들이 제기한 비슷한 소송을 각하해오던 중국 법원이 입장을 바꾼 것이다. 이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위안부 부정 등 날이 갈수록 후퇴하고 있는 일본 정부의 과거사 인식에 대한 비판 여론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소송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3~45년 일본으로 끌려간 중국인 노동자 중 생존자 40명이 베이징 제1중급인민법원에 제기한 것이다. 원고들은 미쓰비스 머티리얼(옛 미쓰비시광업)과 일본코크스공업(옛 미쓰이광산)을 상대로 1인당 100만 위안(약 1억7400만원)의 배상금과 함께 중·일 양국의 주요 일간지에 사과성명을 내도록 요구했다.

 소송 대리인단의 대표인 캉젠(康健) 변호사는 19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법원으로부터 소송을 받아들여 재판을 진행키로 했다는 통보를 받았다”며 “비슷한 소송을 각하하던 법원이 처음으로 재판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캉 변호사는 2000년에도 일본 5개 법원을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허베이성 법원이 이를 각하해 재판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캉 변호사는 95년부터 징용·위안부 문제 등 일본의 침략 피해에 대한 법적 책임을 제기해왔다.

 중국 정부가 여태까지 손해배상소송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72년 중·일 수교 당시 일제의 침략 피해에 대한 배상금을 청구하지 않기로 한 중국 정부의 입장을 고려한 판단이었다. 이에 따라 중국 강제 징용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일본 법원에 손해배상을 몇 차례 제기했다.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에 해당)는 2007년 강제 징용에 대한 일본 기업의 가해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중·일 공동성명에 따라 배상 책임은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일본 법원은 한국인 징용 피해자들이 낸 소송에서도 비슷한 입장을 보여왔다.

 중국인 강제 징용 노동자는 실명이 확인된 피해자만 3만8953명에 이른다. 이들은 조선인 징용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탄광·공사장·군수 공장 등에서 혹독한 육체노동에 동원됐다. 징용 기간에 숨진 중국인 노동자는 6830명으로 확인됐다.

  이번 소송은 나머지 중국인 징용 피해자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 중국 국내법은 일부 피해자가 승소하면 다른 피해자들이 별도 소송 없이도 피해를 구제받는 집단소송제도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소송에서는 법원이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중국 정부 산하 사회과학원 연구원 등이 대리인단에 합류 했고 중국 사법부는 당 지도하에 있어 소송 제기 자체에 정부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 기업의 패소 판결이 내려지고 일본이 불복할 경우 가뜩이나 악화된 중·일 관계에 적잖은 파장을 불러올 전망이다.

 중국 외교부는 19일 “일본이 저지른 죄로 노동자들의 권익이 오랫동안 침해됐다. 일본이 역사를 직시하고 이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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