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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조국 떠난지 반세기…소 민속학자가 살펴본 실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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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인들의 집 구조는 도시의 집들과 비슷하다. 대부분 흙으로 지었고 방은 3∼4개다. 대체로 도로쪽으로 향해있고 집 주위엔 흙담이 높이 둘러싸인 채소밭이 있다.
그들은 직접 집을 짓는 일은 거의 없다. 한인들의 집은 대개 「우즈베크」인과 「타타르」인으로 구성된 「주택건설대」가 지은 것들이며 때로는 소련인들이 지은 집을 사들이기도 한다.

<난로에 연결된 구들장>
한인들의 집은 대체로 두 가지 형이다. 하나는 온돌난방장치를 갖춘 그들의 재래식 집이고 또 하나는 그런 것이 없는 중아식의 집이다.
구들방이라 해도 그들 본래의 것과는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우선 더워진 공기가 바로 굴뚝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다른 방을 덥힐 수 있도록 「러시아」식 난로 연통에 연결돼 있다.
이것은 한족재래식과 「러시아」식을 융화시킨 독특한 것이다.
또 과거처럼 굴뚝을 흙과 돌로 쌓지 않고 모두 벽돌로 균형 있게 쌓아올렸다. 아궁이에 솥을 거는 일도 없다. 지금은 편편한 「러시아」식 「스토브」를 만들어 거기에서 음식을 익히고 물을 끓인다.
구들구조는 입주자 스스로가 만들거나 주택건설대의 한인대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구들기술자는 존경받는 전문가다.
구들은 이민족들에게도 높이 평가돼 「우즈베크」인이나 「타지크」인들이 한인들에게 부탁, 온돌로 집 구조를 고치는 경우가 있다.
수를 놓아 만든 베갯잇은 어느 가정에서나 볼 수 있다. 벽에는 사진들이 걸려있고 창문은 명주나 수놓은 「커튼」으로 가려있다.
집집마다 전기가 들어가고 모든 가정에 전기다리미나 음식을 덥히는 전기기구가 갖춰져 있다.
옷은 도시복장을 많이 입는다. 남자들은 군복형의 「베이지」색 견직양복을 좋아한다. 이런 형태는 「우즈베크」인이나 「타지크」인에게도 널리 보급돼갔다.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부녀자들은 합섬으로 된 「드레스」가 많다. 이것은 「우즈베크」인들에게서 흡수한 것이다.

<결혼·첫돌·생일 큰 행사>
치마나 저고리는 각 가정에 보관돼있기는 하나 나이 많은 사람들만 입는 것 같다. 재래식 의상 중 조끼는 아직도 널리 입혀지고 있다. 그러나 명절이나 경사날에는 온 가족이 한복을 입는 것은 상례로 돼있다.
소녀들은 머리를 두 갈래로 땋고 부인들은 땋은 머리를 둘둘 감아 쪽을 끼었다.
음식은 별로 변한 것이 없다. 밥이 주식이고 김치·간장은 중요부식이다. 밥을 지을 때는 소금을 친다.
국수도 많이 먹는 편이다. 국수는 빵에 넣는 「이스트」를 섞어 만든다.
결혼식이나 첫돌, 부모의 생일잔치는 중요한 행사이며 엄숙하게 차린다. 이날을 위해 친척들이 열흘 전부터 모여 음식을 만드는 등 준비를 한다. 경사날의 식탁에 과줄(유밀과의 일종)이 안오르면 「빈상」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요즘엔 빵과 「버터」·우유제품의 소비가 격증하고 있다. 식탁엔 쌀죽과 빵이 꼭 오른다. 이것은 현지 이민족들의 영향이다. 그러나 이민족들도 지금은 한인들의 김치와 국수·두부 등을 만들어먹고 있다. 약한 소수의 민족이 조국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중앙의 회교권에서 이민족과 함께 「한국」인도 「조선인」도 아닌 「고려사람」이라고 자칭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 있는 일이다.
그들에게는 고유한 민족문화의 제요소가 그대로 보존돼있어 한민족의 뿌리깊은 전통을 높이 평가하게 된다.
오늘의 재소한인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민족문화」와 현지의 「소련문화」 등 두 가지 문화권속에 살고있는 것이다.
소련권에 완전히 흡수되기에는 민족문화전통이 너무나 강하고 그들의 문화를 변질 없이 보전하기에는 현지상황이 조국의 그것과 너무나 이질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두 가지 요소를 조화 있게 소화해내고 있는 것이다.
59년에 실시된 소련인구조사에 의하면 재소한인은 총31만4천명이었다.
그중 대부분이 소련남부의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극동지역에 밀집돼있다.

<세기초 정착, 마을 이뤄>
이 분포상황을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중앙「아시아」지역은 「우즈베크」에 13만8천5백명이 살고있어 총인구의 1·7%에 이르고 「카자흐스탄」에 7만4천명(0·8%), 「키르기지아」에 3천6백명, 「타드지키스탄」에 2천4백명, 「투르케스탄」에 1천9백명이 각각 살고있다.
극동지방의 재소한인은 모두 9만1천명으로 대부분 「사할린」과 그에 인접한 「하바로프스코」에 모여 있다.
한인들은 그들 자신을 「고려사람」(Koryosar)이라고 부른다. 한인들이 처음 이곳에 도착한 것은 1920년대 초반이었다. 1924년에는 이미 「타슈켄트」시에 「한인농업생산자협동조합」이 구성됐다.
그때 정착 한인들과 그 후손들이 「타슈켄트」주위에 9만6천1백55명, 「카자흐스탄」의 「알마아타」에 2만5백2명이 한인촌들을 이루어 살고 있다.
「타슈켄트」는 남부중앙「아시아」의 가장 큰 도시로 이 지역 철로의 중앙교차점이 돼있는 교통·문화의 중심지다.
주요농작물은 조·쌀·밀 등이며 양잠과 양·염소의 사육도 성해 소련경제의 주요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지방의 민족구성은 극히 복잡하다. 「우즈베크」인, 「타드리큰」인,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카자크」인, 「키르기즈」인, 「아제르바이잔」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타타르」인 등이다.
「우즈베크」 「투르케스탄」 「키르기지아」의 원주민은 「터키」계 민족이고 「타드지키스탄」은 「페르샤」계다.
그들의 85%가 회교를 믿고있다.
한인들이 처음으로 조선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집단 이주한 것은 1863년으로 밝혀져 있다.
대부분은 반도의 북부지역출신으로 육로로 소련에 이주했지만 적지 않은 남부사람들이 해로로 이동한 것으로 밝혀졌다.

<소련어 능통 차차 동화>
이들 한인들이 처음 소련에 이주하여 「시베리아」의 극동지역에서 사는 동안 이미 소련문화와의 동화과정이 시작되었다. 특히 도시주변에 정착한 사람들은 재빨리 소련어를 배우고 소련의 도시문화를 활발히 흡수해들였다.
그들이 다시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뒤에는 인근 타민족집단의 문화와의 동화과정이 시작됐다.
이 중앙「아시아」에서의 새로운 동화과정에는 극동지역에서 배운 소련어가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촉매제가 되었다.
중아 한인사회의 문화과정에서는 중요한 세 가지의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민족전통의 유지·발전 ②소련문학의 대담한 흡수 ③중아생활양식에의 적극적인 동화 등이다. 이 같은 세 가지 경향은 각각 역사적인 근원을 가지고 물질문명·정신문화에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되어 전개돼 나가고 있다. <이문웅씨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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