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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교의 기틀 잡은 큰 기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생노병사가 당연지사임이야 뉘 모르랴만 양유찬대사의 부음을 듣고 보니 망연자실할 뿐이다.
형제보다 가까운 친구였고 외교관동료였던 양대사의 별세에는 「쇼크」를 아니받을수 없고 생사의 무상함에 비감을 금할수가 없다.
돌이켜보면 양대사와 인연을 맺은지가 50년이 넘었다. 「하와이」에 「코리어·콤파운드」라는 한국인학교를 세워 교포자녀들을 상대로 민족교육을 시키고있던 이승만박사에게 왕래하면서 처음으로 그 학교의 학생이던 양대사를 알게됐는데 그때가 1915년이던가.
그 뒤 「보스턴」대학교의 대생이던 시절에도 그는 방학때면 내가 학비를 벌수있도록 일자리를 마련해뒀다. 정말 지금 생각해도 고맙다.
「오하이오」주립대학에 입학하기전 「마운트·허먼」이란 학교에 다니던 내가 벽촌목재소에서 학비를 벌고있던 양대사의 기별을 받고 찾아나섰다가 길을 잃어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보호받았던 일은 양대사가 두고두고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소개하던 「에피소드」이기도 했지만…
그가 51년 돈을 많이받던 「하와이」의 산부인과 병원문을 닫고 이박사의 요청에 따라 주미대사가 된 이래 주「유엔」대사던 나와는 매년「유엔」총회가 열릴 때마다 「뉴요크」에서 만나 함께 일했고 그때마다 그에게서 많은것을 배웠다.
그가 일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부러웠다. 서양인을 어찌나 윤활히 다루는지. 비결중의 하나는 「유머」를 잘하는 것이었다. 우스운 소리를 한번 시작하면 그칠줄을 몰랐던 양대사는 마음씨가 또한 소탈하므로 한번 그를 좋아하면 그 정도가 열렬해지니 그는 타고난 외교관이었다.
대통령특사로 「유럽」을 순방했을때도 양대사는 「엘리자베드」영국여왕, 「울리아나」화난여왕등을 만나 친구와 같은 사이가 됐고 어릴적 선생님이 고대통령인 이박사앞에서도 「유머」를 서슴지 않았다. 그의 소탈한 인간미는 음식점 아주머니의 자식을 미국에 유학할수 있게 주선해 준데서도 잘 나타나있다.
양박사가 귀국할 때면 그 아주머니는 정성껏 음식을 차려 「호텔」로 날라다 대접하는 일을 잊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그는 6세에 부모님의 손에 끌려 화륜선을 타고 「하와이」에 건너갈때의 비감을 부드럽고 소탈한 성격으로 길러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서도 양대사는 자신의 소신을 분명히 얘기하는 강한 용기의 소유자였다.
전후복구를 위해 많은 도움을 요청하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미국인을 상대로 할말은 당당하게 거리낌없이 했다. 상대방이 반대할 것이라는 생각때문에 할말을 못하는 외교관이 많으나 그분은 달랐다.
나도 참석했었던 한국전쟁을 마무리짓는 54년의 「제네바」정치회담에서도 미국은 한국입장을 완화하려고 시도했지만 양대사는 변영태외무장관을 도와 강력하게 우리입장을 고수토록했고 미국 상하원의 「리베럴리스드」들이 양대사를 공박했어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외교관에게는 고집도 중요한 자질이다.
그는 술을 많이 마셨다. 지난해 의사가 술을 줄이라고 충고했지만 올 봄 귀국했을땐 음주가 여전했다. 9월에 서울에 오겠다던 그가 타계하니 외로운 마음 걷잡을 수가 없다. 『한국에 돌아가 죽게 해달라』고 한 병석에서의 마지막말은 나라 찾아 여생을 조국에 헌신한 양대사의 바로 조국에 대한 뜨거운 마음가짐이 아니겠는가? 비록 나보다 4년이 연하였지만 나에게는 많은 교훈을 가르쳐 주었고 국가에는 건국초창기의 외교기틀을 잡아놓은 큰 기둥이었다. 고인의 명복을 온 마음을 다해 빌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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