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의 나들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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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일본의 천황이 동경의 구청에 적어낸 국세 조사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고 한다.
가구주 유인, 근무선 국가, 사무 내용 국가 사무, 일의 종류 천황직, 종업상의 지위 피고용인.
「웹스터」 사전을 보면 천황은 『천의 통치자, 신도의 장으로서 일본 황제의 칭호』, 또 다른 사전에는 『종교상의 지도자로 신의 화신이라 여겨지고 있는 일본의 황제』라 풀이하고 있다.
이런 천황이 3억원 이상의 여비를 쓰고 2주일 동안의 미국 방문을 마치고 지난 14일에 귀국했다. 그 동안 미국의 「저널리즘」도 천황의 호칭으로 애먹은 모양이다.
천황은 「킹」 (왕)도 아니고 「엠퍼러」 (황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제일 많이 쓴 호칭은 「히로히도」였다. 그게 제일 듣기도 좋고 부르기도 좋았던 모양이다.
천황은 영어를 못한다. 말주변도 없다. 「포드」 대통령이 베푼 환영 만찬회에서 「포드」가 『저기는 정말 따뜻합니다』해도 『앗, 소』 (아, 그래요), 『부인네들이 저기서 즐거워들 하시는 군요』해도 『앗, 소』 무슨 말을 건네도 『앗, 소』라고만 대답했다고 한다.
이런 천황을 보고 미국민들은 수줍은 탓으로 보고 오히려 좋아했다고.
『「웨딩·케이크」 위에 올려놓은 인형』이라고 신랄하게 평한 신문도 있었지만 일반 시민들은 천황의 언행에 매우 흡족했던 모양이다.
백악관에서 그가 『아이·디플리·디플로』. 지난번 전쟁을 유감스럽게 여긴다는 것은 곧 사죄의 뜻이라 보고 반가와 했다.
「디즈닐랜드」에서 천황이 새빨간 「넥타이」를 매고 미국 어린이들을 귀여워하는 모습도 미국 사람들에게는 흐뭇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형사 「콜롬보」「존·웨인」「찰턴·헤스턴」「진저·로저즈」 등의 배우를 좋아한다는 것도 더욱 친밀감을 갖게 해주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어느 미지의 평대로 『위대한 마지막 생존자』를 구경하려는 미국민에게 유감없이 매력를 담뿍 뿌리고 돌아갔다. 그리고 30년 전의 뼈아픈 상처를 잊으려는 미·일 양국을 위해 천황이 결정적인 공헌을 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것은 구식의 우아한 음악의 「간주곡」』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평한 신문도 있었다.
미국 여행 중에 천황은 일본 왕실의 전통을 깨고 황후를 앞세우고 그 뒤에서 자동차에 올라탔다. 「레이디·퍼스트」의 나라의 구미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록펠러」 부통령의 별장에서 정원을 산책 할 때에는 황후는 그의 3보 뒤를 따라다녔다. 남의 눈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역시 천황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이런 것을 이중성이라면 너무 야박한 관찰이 되겠는지. 어떻든 다시는 그런 것이 정치나 외교에까지도 퍼지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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