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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정권에의 비전자 바스크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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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그날은 장날. 태양이 「게르니카」의 하늘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천둥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비행기였다. 폭탄을 뿌리며 기총 소사가 시작됐다….
이게 무슨 날벼락 이람. 장바닥에서 도망가려는 사람들 위로 마구 쏘아대는 게 아닌가! 성당 앞 광장 가축시장의 양떼에도 비행기는 들이 닥쳤다. 양들은 새하얀 털을 붉게 물들이며 쓰러져갔다. 마치 우리 어린이들처럼….』
1936년 「스페인』내란 때 「프랑코」군과의 협력 하에 「나치」독일 비행기들이 「바스크」족의 마음의 고향인 소읍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할 때의 정경을 그린 『「게르니카」의 어린이들」이란 소설의 한 구절이다. 이때 인구 7천의 이 소읍은 사망자 1천6백54명, 부상자 8백89명의 희생자를 냈다. 「피카소」의 걸작 『게르니카』는 이것을 소재로 한 것이다. 19세기말부터 「바스크」민족당을 중심으로 활발해지기 시작한 「스페인」북부 4개 주 「바스크」족의 분리독립운동은 32년「게르니카」를 이 운동의 중심지로 삼았다. 36년 공화정부에 대한 「프랑코」군의 반란이 시작되자 「바스크」민족당은 자치권 획득을 조건으로 반란군 측과 합세하려했다. 「바스크」족의 종교적이고 보수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랑코」측은 「바스크」족의 희망을 들어줄 의향이 아니었으므로 「바스크」민족당은 공화정부 측에 협력을 구했다.
공화정부는 36년 「바스크」자치법을 제정, 자치정부를 성립시킴으로써 보수적인「가톨릭」교도나 「부르주아」할 것 없이 「프랑코」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 했다.
「프랑코」군의 승리로 무산된 「바스크」독립의 꿈은 20년 뒤인 56년 ETA(「바스크」조국 및 자유라는 뜻의 「바스크」어 약자)라는 비밀지하조직이 성립되면서 다시 표면화했다.

<종교적·보수적 성격>
급진적인 청년들이 이름뿐인 「바스크」민족당에서 이탈할 것이다.
ETA는 「바스크」족의 민족적 항쟁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정부의 탄압을 유도해야 된다는 극단적인 가설아래 그 수단으로 「테러」를 택했다. 「테러」행위가 격화되면 정부의 탄압은 불가피하리라는 판단이었다.
이러한 전략이 실체화한 것이 68년「바스크」주 제2의 도시 「산세바스챤」비밀경찰책임자의 살해였다. 「바스크」분리주의자에 대한 고문행위가 그를 대상자로 선정한 이유였다.
이 사건으로 6백여명의 「바스크」인이 관련자로 체포되어 이중 32명이 군재에 회부됐다.
이 가운데 6명이 사형선고를 받자 서구의 여론이 빗발치듯해 「프랑코」총통이 30년형으로 감형했었다.
그러나 「바스크」분리주의자들의 운동은 73년 「프랑코」총통의 심복인 「볼랑코」수상의 암살에 이어 최근의 은행습격, 경찰관 살해 등의 행동으로 이어지고 외국 도시 「게릴라」조직과의 제휴도 모색, 계속 확대될 기미를 보이고있었다.
「바스크」족의 이러한 활동은 그 특이한 민족적 기질, 인종적 특이성 때문에 주목되는 점이 많다.
「바스크」족은 지금까지 숱한 인류학자·언어학자들의 골머리를 앓게 해온 민족 이기도하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지대인 「피레네」산맥지방을 중심으로 두 나라에 살고있는 이 민족은 「스페인」에 75만, 「프랑스」에 12만명이 집단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며 각지에 흩어져 있는 숫자까지 합치면 2백70만∼3백만명 정도 추산되고 있다.
「바스크」족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지기로는 이들이 「유럽」의 어느 민족과도 혈연관계가 없으며 다른 민족보다도 훨씬 먼저 선사시대부터 「피레네」산맥을 중심으로 생활했다는 점이다.

<모두 3백만명 추산>
역사가와 인류학자들은 이「바스크」족의 기원을 찾다못해 원시인인 「크로마뇽」인의 후예라든가, 선사시대 대 서양에서 고도의 문명을 꽃피웠다 바다 속으로 침몰했다는 전설적인 「아틀란티스」피난민의 후예라는 진설까지 나올 정도다.
이상하게도 이들의 50%가 우리 나라에서는 희귀한 Rh「네거티브」혈액형을 갖고 있다. 「바스크」어 역시 그 연원을 찾을 수 없는 고립어로서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인접 「프랑스」나 「스페인」어와의 관련성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억지로 다른 언어와의 관계를 찾다보니 「아프리카」의 「햄」어·「핀란드」어·영국의「웨일즈」어·「시베리아」어·「에스키모」어, 심지어는 일본어와 상통하는 점까지 발견되어 언어학자들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언어자체도 어찌나 어려운지 어느 민속학자가 「바스크」의 민요를 7년간 연구한 끝에 해독한 단어가 「술」과 「여자」단 두 마디밖에 없었다는 농담도 있다.「바스크」어는 36년 「스페인」내란 때부터 민족탄압의 수단으로 학교나 관공서에서 사용이 금지되어 산간지방에서 명맥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바스크」족의 강점은 이러한 민족적 특성을 외래문화에 침식당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강렬한 애향심·자존심·독립심에 연유한다. 남미와 북미로 이민간「바스크」족들은 성공하면 대부분이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이 이를 설명해 준다.

<베레모, 세계에 보급>
합리적인 「바스크」족의 사고방식은 실생활 면에서 농민의 경우 기생적인 봉건적 대지주가 없고 소규모 자작농이라는 데서 잘 드러난다.
비록 특이한 문화를 고수하고 있지만 문화면에서 이들「바스크」족이 세계사적으로 기여한 업적은 많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전통적 민족의상인 「베레」모가 세계적으로 보급됐다는 점, 「게바라」·「에체베리아」·「볼리바」등 「바스크」족의 성이「스페인」계 구 식민지의 지명이나 인명으로 흔히 사용됐다는 점등이다.
우리 나라 중·고등학생들이 영어 속담으로 배우는 『손아귀의 한 마리 새가 숲 속의 다섯 마리 새보다 낫다』는 말도 「바스크」족에서 유래한 것이다. 「바스크」가 배출한 인물로는 「가톨릭」의 엄격한 「제주잇」교파를 창시한 성「로욜라」, 일본에 기독교를 전파한 「자비에르」가 있고 최근에는 「프랑스」의 인상주의 음악의 대가「모리스·라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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