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용기를 북돋기 위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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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암담하고 침울한 여건 속에서도『밝은 내일에의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 슬기로운 삶의 태도다.
우리는 이러한 어려운 시대적 상황을 극복하고, 밝은 미래를 개척, 확보하겠다는 높은 이상의 실현을 위해 꾸준한 노력을 경주하는데서 보람을 찾아야할 것이다.
현실이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사람들은 흔히 좌절과 절망 속에 몸을 내던진 채 장 탄식만을 일삼는다. 그러나 생명의 본질과 가치를 존중하는 의지력은 한시도 이러한 좌절이나 절망에 침몰될 수 없는 것이다.
과연 희망은 생명구조의 본질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생명과 성장을 위한 정신적 부수물이다. 우리의 사회를 보나 역동성 있고 건실하게 만들려는 순수한 이성의 근거이기도 하다. 「생명의 약동」은 희망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본질을 지키는 것이다.
희망은 흔히 오해되듯이 단순한 욕망일 수도 망상일 수도 없다. 보다 많은 재화를 추구하는 따위의 욕구 속에서 희망의 정신이 배태될 수 없으며 현실을 몰각한 환상에 침잠할 때 희망이 소생할 수도 없을 것이다.
장차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억지로 일으키려는 비현실적 만용이나 오직 처분만 기다리는 식으로 수수방관하는 기다림이 희망일 수도 없다.
체념으로 위장된 무의지, 끝도 없이 허탈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기다림은 희망이 아니라 오히려 절망을 대변한다.
그렇다고 급진적인 모험주의나 현실을 무시한 지적 백일몽들을 참다운 희망과 혼동할 수도 없다.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어리석음이나 현실상황을 무시한 「유토피아」의 꿈을 칭찬할 수가 없는 것이다.
희망은 신념과 함께 있는 것이며, 사랑과 결합된 것이다. 신념은 아직 증명되지 않은 것을 믿는 정신력, 참된 가능성을 아는 통찰력, 또는 배태되어 있는 것을 체감할 수 있는 지혜의 힘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자기존재를 매몰하는 피동적 허상에 대한 맹신은 비합리적이다.
한편, 그릇된 우상과 거짓된 지도자와 인간을 노예화하는 「이데올로기」는 참다운 신념의 동반자일 수 없다.
사랑의 사회를 구축하겠다는 신념은 참다운 희망의 전개다. 그러나 거기엔 낙천적인 것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희망은 위기요 불안이며, 투쟁적인 과정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것은 용기, 「스피노자」적인 「불굴의 정신」을 요구한다. 그 용기는 체념주의자의 무모성이 아니라 삶에 대한 열망, 사랑의 실천 속에 지속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어두운 현상을 넘어서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용기다.
분명히 정치 군사적인 위협의 분위기나 경제적 궁핍의 비참성이나 인간존재의 도덕적 파탄의 위기 앞에서 우리는 내일을 잊기 쉽다.
물질생산을 위한 한 부분품으로 전락한 인간은 재화의 축적과 소비를 지상의 과제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관료화한 산업사회에서 사람은 무력하고 감정이 메말라 버린 인형으로 전락한다는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불안하고 고독한 개인은 결국 도피의 출구를 찾거나 비합리적 권위에 열광적으로 맹종하거나 울적한 충동을 파괴적으로 폭발시키기 쉽다. 그러나 희망을 잃고 파괴적 폭력 속에 난파하는 인생은 인간가족의 유대감을 해치는 비극을 가져온다.
진정한 희망이 없는 사회, 신념과 용기가 허용되지 않는 사회엔 미래가 없다. 참다운 희망은 사랑과 인간존중을 통하여 개인이 누구나 창조적 활동에 전념할 수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그런 만큼 「생명의 비약」이 개인이나 사회에서 가능한 것은 이 희망과 용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회복하는 국민 모두의 노력이 오늘의 시점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기대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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