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3㎡ 빈곤의 섬에 갇힌 14만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지난 16일 서울 영등포에 있는 자신의 고시원 방에 앉아 있는 서모(64)씨. 8년 전 고시원 생활을 시작한 이후 세 번째 방이다. 공인중개사부터 경비에 이르기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지만 이곳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김상선 기자]

나는 서울 영등포 고시원에 산다. 말이 고시원이지 공부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2006년 들어왔으니 벌써 8년이 됐다. 내 나이 예순넷. 가장 바쁘게 보내야 할 50대를 한 평 남짓한 쪽방에 갇혀 허망하게 지냈다.

빚보증 섰다 가족·직장 모두 잃어

 20여 년 전 나는 서울의 구청 공무원이었다. 딸 둘은 잘 자랐고 아내와의 관계도 나쁠 것 없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그런데 친한 동료의 빚 보증을 잘못 선 게 화근이었다. 빚 독촉에 시달리면서 가정도 직장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연금 대신 일시불로 퇴직금을 받았지만 빚을 갚기엔 역부족이었다.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온 날 아내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만두면 좋겠어. 우리 딸들을 빚쟁이 자식으로 키울 순 없잖아.”

 빚과 이혼은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유일한 재산이었던 아파트는 딸 둘의 양육권을 지닌 아내 몫으로 돌아갔다. 실패한 가장인 나는 친척집을 전전했다. 공무원 시절 땄던 공인중개사 자격증으로 부동산사무소에서 임시직 일자리를 얻었다. 지리를 익힐 만하면 부동산이 문을 닫는 바람에 이곳저곳 옮겨 다녀야 했다. 눈칫밥을 먹는 것도 한계에 도달했을 즈음, 나는 고시원행을 택했다.

닥치는 대로 일해도 더 깊은 수렁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처음 고시원 쪽방을 본 내 반응이었다. 3.3㎡(약 한 평)쯤 될까. 내 한 몸 뉘면 꽉 차는 그 공간에서 나는 6개월만 버티자고 생각했다. 닥치는 대로 일하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이미 신용불량자가 된 나를 받아 줄 일터는 없었다. 지인의 소개로 경비 일을 시작한 건 그나마 행운이었다. 조금이나마 저축을 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1년 전 온 중풍이 다시 발목을 잡았다. 거동이 불편해지자 일도 절반밖에 할 수 없었다. 가끔 얼굴을 보던 딸들과도 점점 멀어졌다. 6개월 후 탈출하자던 다짐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이곳은 한 번 들어오면 쉽게 벗어날 수 없는 ‘빈곤의 감옥’이었다.

 고시원에선 나와 같은 ‘벼랑 끝’ 인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살아간다. 애초부터 극빈층이었던 사람들만 사는 게 아니다. 대기업에 다녔거나 한때 ‘사장님’ 소리를 듣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추락한 사람도 많다.

“난 재기할 거야” 희망 품게 해줘야

 서울시가 지난해 1월 발표한 ‘비주택 거주가구 주거 지원방안 마련을 위한 연구’에 따르면 서울시내 고시원 거주가구는 2004년 6만2975가구에서 2011년 13만8805가구(14만4357명)로 급증했다.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싼 방을 좇아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일종의 현대판 ‘유민(流民)’이다. 우리 같은 ‘벼랑 끝’ 인생도 재기할 수 있을까.

 ‘이 거대한 밀실 속에서 혹시 실패를 겪거나 쓰러지더라도 그 모두가 돌아와 잠들 수 있도록…’.

 박민규의 소설 『갑을고시원 체류기』에 나오는 대목이다. 우리 사회가 사업 실패, 실직 등으로 인한 사회적 패자(敗者)에게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제도적으로 마련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나 같은 사람들도 한 평짜리 방에 고단한 몸을 뉘며 내일의 희망을 품을 수 있다.

◆특별취재팀=정강현·민경원·이서준·구혜진 기자

※이 기사는 영등포 고시촌에서 살고 있는 서모(64)씨의 실제 사례를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