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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안중근 동영상' 1909년 12월 파리에 있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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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암살 영상 매물로 나와’. 1909년 12월 미국 연예주간지 버라이어티 14면에 소개된 15줄짜리 기사 제목이다. 12월 6일 파리에서 전송된 단신 기사 속의 매물은 안중근 의사가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는 순간을 담은 영상이다. 기사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영화사가 소유한 ‘특별한 영상’을 15만 루블에 내놓았다고 전했다. 15만 루블을 현재가로 환산하면 약 15억1000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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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계는 그동안 안중근 의사의 의거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기대를 품어왔다. 이 기사에 따르면 안 의사의 저격 영상은 당시 영화의 중심지였던 파리에 매물로 등장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신운용 책임연구원은 “파리에서 전해진 소식인 만큼 필름이 유럽 다른 지역에 남아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안 의사 영상 원본은 일본에 있을 것으로 추정돼 왔다. 신 연구원은 “95년 일본 NHK가 제작한 다큐멘터리에 하얼빈역 의거 장면이 짧게 편집돼 있는데, 이는 40년대 일본에서 제작된 ‘뉴스 영화 발달사’를 재편집한 것”이라고 말했다. NHK 다큐멘터리엔 저격 장면이 빠져 있다.

 안 의사 영상 관련 소식은 버라이어티 보도 이후 싱가포르 영자지 스트레이츠타임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스트레이츠타임스는 1909년 12월 22일자 3면에 ‘이토 후작 암살 필름 기록적 가격’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기사에 따르면 길이 500피트(약 10분)짜리 필름의 구매가격은 1만5000엔(현재가치로 약 3억7000만원)이었다. 신문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필름을 사기 위해 경쟁했지만 결국 ‘재팬프레스에이전시’의 ‘미스터 다노모기’가 낙찰받았다고 보도했다. 당시 신문대행업체 관계자로 소개된 다노모기 게이치는 일본 중의원을 아홉 번 지낸 정치인이다. 신 연구원은 “다노모기 게이치가 원본을 구입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런 기사를 보면 사본이 많이 팔렸을 가능성이 있다”며 “어딘가에 남아 있을 영상을 구하기 위해선 학계와 정부의 장기적 계획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스트레이츠타임스는 이날 저격 영상이 영화 필름 사상 최고가라고 전했다. 신문은 또 동영상에 담긴 내용을 비교적 상세히 설명했다. 이토가 하얼빈에 도착하는 모습, 코콥초프 재무장관과의 만남, 플랫폼 환영 인파와 인사, 저격, 기차 안에서 죽어 가는 이토, 암살자의 체포가 고스란히 포착됐다고 소개했다. 같은 날 7면엔 관련 기사로 ‘이토 살인 용의자 상하이 변호사 선임’이라는 소식도 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기사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 변호사를 통해 상하이의 J C E 더글러스가 ‘용의자(안중근 의사)’의 변호를 맡게 됐다고 전하고 있다. 더글러스는 당시 옥중의 안 의사를 만났으며 “그가 친구와 지인들이 자신을 잊지 않았음을 감사하게 생각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로 더글러스는 안 의사의 변호를 맡지 못하고 이듬해 2월 열린 재판에 방청객 자격으로만 참관했다.

 안 의사의 저격 동영상이 당시 국제사회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는 정황은 그동안 종종 소개돼 왔다. 관심이 높았다는 것은 사본이 많았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1910년 8월 14일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저격 영상을 담은 필름 2개가 미국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전율의 순간에 찍힌 이례적 순간들’이라는 기사 중 안 의사의 저격 영상이 한 사례로 소개된 것이다. NYT는 이 장면이 ‘우연하게 극적인 장면을 잡아낸 좋은 예’라고 전했다.

 NYT는 이 기사에 저격 장면을 묘사한 삽화를 곁들이기도 했다. 삽화에선 안 의사가 기모노를 입고 이토를 향해 권총을 쏘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왼쪽엔 큰 카메라를 든 남성이 이를 기록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이는 허구다. 안 의사는 저격 당시 양복을 입고 있었다. 또 NYT는 재판 중 이 영상이 증거물로 상영됐다고 보도했지만 이 역시 오보인 것으로 드러났다.

전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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