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5)| 전국학련<제47화>-나의 학생운동 이철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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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국학련은 좌익 학생 단체인「학통」과 대응하는 조직체로서 출범했다. 그러나 전국학련 중앙집행위원을 선정하는 데는 매우 고심했다. 서울대학 고려대학 연희대학 성균관대학 동국대학 등 각 대학의 간부급 학생이 모두 모여든 데다 경성대학 동지회·독립학생전선·유학생동맹 등 각 단체 등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배원칙을 택하는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대동단결하자는 명분 밑에 서로 양보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서울대학 8명, 고려대학 12명, 연희대학 6명, 기타 각 대학에서 4명, 그리고 중등학교 2명이 선출됐다. 당시 각 대학과 중학교에서 전국 학련에 참여한 중요 「멤버」는 다음과 같았다.
▲「고대」=이철승 장익삼 박석규 윤원구 신동희 홍순호 김평묵 윤막병 김용문 김병국 김동흥 윤위영 김창구 이덕원 가구환 정규혜 박철용 오홍석 양량춘 말원영 조병후 ▲「서울대」=채문식 이인세 엄규진 계렴제 (이상 문리대) , 조한원 최영근 서재성 최형일 (이상 법대), 현영원 최찬영 김재정 장갑진 이희준 정성관 이화직 송오국 주종건(이상 상대), 이병한 이경호 배현종 이학구 김수룡 장충식 (이상 공대) ▲「연대」=이동원 김득신 장정덕 안경득 박세영 박갑득 ▲「성대」=정국권 이세광 이광하 김사환 정윤박 최봉린 김상전 이원홍 ▲「동대」=이외윤 신국주 홍관직 김은하 이규원 정택 윤호식 김재학 손영섭 ▲「세의대」=최규직 김재전김향▲ 「국민대」=이철우 김진근 <소국학련 중앙집행 조종>
장근환 ▲「신학대」=김진철 이종환 ▲「유학생동맹」=박용만 김만권 김호영 ▲「서북학생단체」=탁순학 안기백 중등학생의 주요 「멤버」는 「경기」=조병봉, 「서울」=송영달, 「경습」=전덕홍, 「보성」=장영일 정성구, 「휘문」=임근희·김남윤, 「사대부중」=손도성·김윤경, 「배재」=손한선·이규룡, 「서울공」=최광호, 「주양공」=고병두·고병현, 「경신」=오정환·정운흥, 「경기상」=김달영·박신길, 「영창중」=하경렬·장시각, 「성남」=손완직·안중덕, 「서울전기」=이승철, 「양정」=이건형·서영남, 「조공」=박혜호, 「서울사범」=최동근, 「성간공」=이병노, 「숙명」=장희자·김인태, 「배화」=강석자·최광옥, 「한성여」=엄영희·권정숙, 「덕성」=송문옥·이순왕, 「상명」=조승일, 「중앙여」=이재철 등.
전국 학련은 사무실도 관수동에서 교통이 편리한 광화문중심지 쪽으로 진출했다. 청진동 입구 구자유당이 있던 현 서울시 농협자리 1층-.
이 곳은 46년8월1일부터 10월말쯤 구 이문당(현재신민당당사) 자리로 옮길 때까지 학련의 지휘탑으로 사용됐다.
사무실을 옮기면서 일도 바빠졌다. 맨 먼저 시작한 것은 계몽활동이었다.
이야기가 거슬러 올라가지만 46년7 윌 어느 날이다. 반탁학련이 「ㄱ」「ㄴ」「ㄷ」등 , 하기 문맹퇴치운동을 착수하기 직전 나는 성종협 동지와 함께 돈암장을 찾아간 일이 있다.
그러나 막상 이 박사에게 함께 간 함동지를 소개해야 할텐데 그 직책이 없어 난처했다. 그래서 임기응변으로 「반탁학련」의 부서에도 없는『계몽부장 함군입니다』라고 소개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전국학련의 계몽부는 함통(함종회 동지의 구명)이 맡게 됐다.
「전국학련」의 문맹퇴치운동은 경기·강원·충청·경북·경남·전북·전남 그리고 다도해와 제주도까지 실시됐다. 모든 맹원은 자기의 연고지에서 또는 분담에 의한 파견으로 활동을 했다. 계몽대원의 편의는 미군정 내무부장 조병옥, 문교부장 전억경, 공보처장 이철원제씨의 소개장이 지방행정 책임자들에게 전달되어서 이루어졌다.
계몽대가 출발하기 전에는 항상 대원들에 대한 정신교육을 실시했다.
그 때마다 강사로 수고하여 주신 분들은 이선근박사·박순천여사·조소앙선생·전진한선생 등. 이선량 박사는 한말과 비교하여 반탁과 자수독립, 국민의 각성을 호소하는 국사강의를 해주셨고, 박순천여사는 『3·1운동 때의 학생운동의 경험과 나라의 어려움을 구해 낸 여인들의 행주치마고사』, 조소앙선생은『삼균주의와 민족의 주체성 고양』, 전진한선생은 『자유노동운동의 방향』, 설의직선생의 『한민족의 자주의지와 학도의 사명』등을 말씀해 주셨다.
학련운동에 있어 언제나 큰 문제는 재정문제. 그렇지만 대부분의 비용은 임시정부 측, 이박사, 김성수선생 등과 미군경청의 조병왕박사, 장택상씨 등의 소개를 받아 재계경제인들로부터 받았다.
학생들의 단복과 의류 등은 상공부의 오정수 부장·한승인 상역국장 등의 특별배급품 등으로 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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