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신저 장관의「한국회의」제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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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유엔」에서의 한국문제토의에 앞서「유엔」현장에선 갖가지 탐색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키신저」미 국무장관은 23일「유엔」총회정책연설에서 한반도의 휴전협정 유지와 긴장완화를 위한 남북한 및 미-중공의 4자 회의를 제의했다. 이와 함께 우리정부는 안보리에 한국의「유엔」가입 안 재심을 요청했다.
「키신저」장관은 4자 회의의 확대가능성과 남-북한의「유엔」동시가입 그리고 동·서 진영의 남-북한 교차승인도 암시했다.
「키신저」장관의 제의는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포드」미대통령의 중공방문에 앞선 제안이란 점에서 단순한 정치적「제스처」이상의 무게를 지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73년의 경우와 같은 동·서간의 타협을 위한 극적 계기가 마련될 지도 모르겠다.
「키신저」의 제안 중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그가 휴전체제의 유지를 확고부동한 기본적인 조건으로 못박고, 한국이 불참한 한반도문제 논의를 배격했다는 사실이다.
당사자가 참여하지 않거나, 한반도의 평화질서를 전제하지 않은 어떠한 결정도 아무런 의미가 없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의 제안이 합리적이라고 해서 꼭 좋은 결실을 가져오리라 기대하는 것은 너무 소박한 생각이다. 지금 북괴는 사상최초로 공산 측 안이「유엔」총회에서 통과되리란 승리의 환상에 젖어 있다. 북괴로서는 이 승리의 환상에 장애가 될 어떠한 제안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
그렇다고 소련이나 중공이 북괴가 타협에 응하도록 압력을 가하겠느냐 하는 것도 의문이다. 소-중공이 북괴에 타협을 권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공산 측 결의안의 승산이 어두울 때뿐이다. 그러므로 현시점에서 가장 중점을 두어야 할 일은 합리적이고 유연성 있는 제안을 배경으로 한 우리측지지표의 확보인 것이다.
정부가 또 다시 제기한 우리의「유엔」가입 안 재심요청도 남-북한「유엔」동시가입이란 한반도 평화구상의 실현이란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한국가입 안의 재심요청으로「유엔」안보리는 또다시 남-북 월남과 함께 3개국 가입 안을 재심하게 됐다.
이미 3국의 가입 안은 지난달 안보리에서 부결된바 있다. 우리의 가입 안은 의제로조차 채택되지 못하고 폐기 됐었다. 그때와 지금의 사정이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이번이라고 해서 안보리의 재심결과가 다를 턱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사정을 충분히 알면서도 정부가 가입 안을 다시 제기한 것은 남-북한의「유엔」동시가입을 촉구하는 입장에서 그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통일을 지향하는 똑같은 분단국인 남-북 월남의「유엔」가입이 실현되고 말면 남-북한의 「유엔」가입이란 우리의 한반도평화 구상이「유엔」에서 제기될 기회는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3천5백만의 인구를 유효하게 통치하는 한국이 스스로의 의사에 반해「유엔」회원국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일부「유엔」회원국들이 남-북 월의 가입에는 찬성하면서 한국가입 안에는 반대하는 식의「선택적 보편성」이 결코 용납되어선 안 된다.
그렇긴 하지만「유엔」총회의 한국문제토의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두 번씩 가입 안 재심요청을 하는 것이 과연 사려 깊은 행동인지는 의문이다.
대다수 공산 국 및 중립국이 동조하는 남-북 월남의「유엔」가입을 막는 계기를 제공할 경우 한국의「유엔」총회에서의 입장이 좋아지리라고는 상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외교목표와 현실에는 이렇게 단층이 있는 경우가 많다. 외교당국의 좀더 현실에 적응하는 유연한 외교자세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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