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도 대의명분 지켰던 옛 선비|흥사단 금요 강좌서 장덕순 교수 지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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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고대 한국의 선비들은 난세에서도 여유를 가지고 깊게 사삭함으로써 역경을 딛고「대의명분」에 입각한 자세로 현실에 임할 수 있었다.』 흥사단 금요(12일)강좌에서 장덕순(국문학·서울대) 교수는 우리 민족의 원동력을「여유 속의 깊은 사삭」과 그로부터 나온「대의명분」이라고 설명하며, 모든 것이 요령화하고 능률화하는 현대와 현대의 지식인에게 새로운 삶의 방법을 지시했다.
장 교수는 현대의 속성처럼 여겨지고 있는 각종 사회 부조리와 범죄의 원인을『경제적인 여유를 갖기 위해 정신적인 여유를 말살』한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또한 바로 이점이 현대의 지성인을 무력하게 했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던「대의명분에 입각한 생활신조」까지도 망각하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망각했던「민족의 혼」을「정신적 여유」에서 되찾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난세를 슬기롭게 살아간 신라와 고려의 선비들을 예로 들었다.
먼저 그는 이런 선비의 한사람으로 혜초를 생각했다.
혜초는 오천축을 방문한 신라의 고승. 만약 혜초가 정신적인 여유가 없는 사람이었다면 나이 36에「오천축국」(오천축국은 동·서·남·북·중 천축국으로 지금의 인도전국)을 향해 구도의 길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3, 4개월씩 걸리는 각 천축국을 그는 묵묵히 온갖 고난을 이기며 순례했었다. 그 동안 혜초는 천축국 각지에서 고승을 만나기도 하고 혹은 고심하기도 하면서 깊은 사삭을 할 수가 있었다. 이의 결실이『왕오천축국전』이다.
같은 신라승려인 원효는 요석공주와 결혼하여 설총을 낳을 정도로 자유분방했다.
또한 거리를 다니며 노래(무사가)를 부를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장 교수는 원효의 기본사상인「화쟁」과 인생에 대한 깊은 고뇌의 결실인 81부에 달하는 불서저작은 정신적인 여유가 있는 생활관의 소산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세째로 장 교수는 여유 있던 옛 지식인으로 최치원을 들었다.
고전(최치원의 호)이 12재에 당에 유학을 가던 중 쌍여분의 묘를 지나면서 읊은 연애시는 그의 낭만성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지방의 태수를 하던 중 모함 당해 귀양을 갔을 때 유배지에서 고심했던 한없는 그의 사삭은『계원단경』의 원동력이었다.
말년 신라 국운의 쇠퇴함을 보고 지리산에 들어가 종적을 감춘 것도 신라 지성인의 한 단면이었다.
최충헌 등의 정변으로 난세의 고려에서 고구려 정신의 원류를 되찾으려고 했던 백운 거사 이규보에서도 옛 선비의 일면을 볼 수가 있다.
문인이 말할 수 없이 수난을 받던 당시의 고려에서『이상국집』을 저술, 지식인의 참 삶을 밝힌 이규보는 고려지성인의 대표적 존재라 할 수 있다.
장 교수는 마지막으로 여말의 여유 있는 생활인으로 익재 이재현을 들었다.
익재가 여말의 난세에서 우거하지 않고 정치의 일선에 나서 간신들이 고려를 몽고의 한 성으로 할 것을 청했을 때『국기국 인기인』이라 주장하여 붓으로 국가를 지킨 것은 지식인만이 할 수 있는 여유 있는 보국의 길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현실에 집착하고 초조해하며 먼 역사의 지평을 바라볼 줄 모르는 오늘의 지식인들에겐 조용한 만종을 울려주고 있다. 앞서의 선비들은 저마다 어지러운 시대와 풍파 속을 살아왔지만 그들은 그것을 슬기롭게 견디는 인성과 금도와 정신적인 여유감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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