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436)<제자·이철승>|(제47화)전국학련<나의 학생운동 이철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중등부연맹결성
46년2월6일 미·소 공위 예비회담은 한 장의 공동성명만을 남긴 채 폐회했다.
성명내용은 앞으로 l개월 안에 미·소 각 5명씩 대표를 선정해 「공위」를 다시 연다는 것.
당초 1월16일 공위가 막음 열때만 해도 미국대표 「하저」와 소련대표「스티코프」사이에 미·소 양국 조속한 시일 안에 조선의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화려한 공약을 했었다. 그 때로 미국이 남북한 물자거래·화폐통일·신문의 자유배포 등 손쉬운 것부터 다루자고 맞섰다.
「공위」가 시발부터 난관에 봉착하자 좌 우익간에 민감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2월8일,김일성은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조직, 공산체제를 굳혔으며 남한에서는 비상국민회당를 소집해서 민족진영의 대동단결을 도모했다. 미군정 당국도 민주의원을 창설실(2월14일)해서 그들의 자문기관으로 삼아 자체정비와 사태변경에 대비했다. 그러자 좌익계에서는 이에 즉각 맞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결성, 민주의원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나섰다.
허경, 박민영, 여운형 김원봉을 공동의장으로 하는 이른바 통일전선을 형성했다.
그러나 그 주역은 역시 남노당의 박헌영. 박은 고향인 충남 비산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고보를 거쳐 동아·조선에서 기자생활을 할 때까지만해도 더없이 조용한 청년이었다는 것. 그러나 1922년 공산당에 가담하고부터는 더 없이 과격하고 비타협적인 인물로 표변하였다는 것이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의 얘기다. 이승만 박사와 박혜영과의 면담비화를 당시 이박사 비서실장이었던 윤치영씨는 다음과 같이 공개했다. 『이박사가 환국 직후 한번은 박을 돈암장으로 불렀어요. 그리고는 좌,우합작의 첫 식도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우선 3개월만이라도 힘을 합치자. 그 후 부터는 당신하자는 대로 할 터이다」 이렇게 간곡히 부탁했어요. 그러자 박은 「무조건 뭉치라니요? 노선이 같아야지요」라며 싸늘하게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나중 2차에 걸친 협상 때에는 김삼룡 이주하등 대리만 내세우고 자취를 보이지 않았어요.』
이렇듯 정국의 상황이 좌우대립으로 격렬해 질수록 반탁학연의 역할도 커졌다.
조직의 확대강화가 시급했다. 그래서 제1차로 착수한 것이「중등부연맹」의 결성.
「중등부 연맹」을 다로 결성함으로써 반탁전국학연의 전위부연로 삼으려 한 것이다.
결성대회는 46년3월9일, 서울 새문안교회(종로구신문로)에서 1천여 서울시내 남녀중등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그 가운데서도 정국권(성동)·안원영(양정)·이세광(양정)·홍치직(보성)·정성구(보성)·정어웅(보성)·오홍장(보성)·박완(중앙)·김상종(중앙)·각권영(중앙)·양근춘(성남)·성태혁(경기)·김길원(덕수상)·황치석(진명)·장길자(숙명)·성영군(숙명)·김인태(숙명)·윤금종(덕성)등의 면모가 기억된다. 하오3시 양근춘동지의사회, 김호중군의 개회사, 오홍석군의 경과보고로 막이 올랐다.
단상의 좌우에는 「임시정부주석 김구」와 「우남 이승만」이라고 쓴 축하 화환이 유난히 돋보였다.
나는 「반탁과 한국학생의 사명」이라는 줄거리로 격려사를 했다. 이어 내빈으로 참석한 조소양 선생은 『중학생까지 거리에 나서게 된 것은 슬픈 일이나 조국은 여러분의 젊은 애국정신을 요구한다』고 격려해주었다.
대회는 정국권의 「이북학생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하고 끝났다.
첫 사업은 각 학교별로 조직을 확대하고 반탁격문을 붙이는 일, 그리고 앞서 전문대학생「팀」에 이어 이북공작원를 파견하는 일이었다. 46년3월11일게(?) 황해도방면 양근춘 정국권, 함경도 방면 위인환 이병한 이희준군 등 정예요원들이 서울역을 출발했다.
그러나 떠난지 5일만에 정,양동지가 사색이 되어 돌아왔다.
이들은 청단까지 기차를 타고 거기서부터 걸어서 38선을 넘어 학현에서 다시 기차로 협리원에 잠입했으나 마침 북한에 공민증제도가 생겨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고 했다. 다만 사리원 농고생인 오중현 등 10여명과 접선해서 반탁활동방안을 의논했고 밤새우며「비라」를 뿌렸다. 그러다가 보안대원에 쫓겨 천신만고 탈출해 왔다고 했다. 그러나 그 후 정성관 동지(관광공사부총재)로부터 들은 이야기에서 이들의 활동성과가 결코 작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나는 고향인 황해도 송화에 가는 길에 옹진에서 한독당북한 책임자로 오인돼 소련군 극동사령부 「게페우」해주교화소에 1백여 일 수감됐었다. 독방에 5백촉 짜리 전구를 켜놓고 잠을 못 자게 하거나 또 음식에서 염분을 전부 제거해내 힘을 빼는 고문을 당하면서 지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속에서 사리원 농고생들을 만났다. 그들은 나에게 반탁학련에서 마련한 양,정동지들과 만나 학생활동을 벌이기로 했으며 그들이 떠난 뒤 지하에서 반탁학생운동을 하다 피검해 주로 압송되어왔다고 말했다. 이들 사리원 학생들은 철창사이로 나눈 대화를 통해 남한의 학생들에게 북한의 실정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바로「시베리아」로 떠나고 말았다. 정성관 동지는 이렇게 당시를 회고했다. 그 후 정 동지는 요행히 석방되어 남쪽으로 오는 물물교환선에 몸을 숨겨 탈출에 성공했고 반탁학련에 가입해서 학생보 편집간부로 활약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