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웨이터」가 된 삼성장군|전 월남 육군참모총장의 망국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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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장군과「웨이터」-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영화제목 같은 두 단어는 망국의 설움을 한마디로 말해주고 있다.
지금은 미국「버지니아」주 어느 식당에서 주급 1백65「달러」(6만6천원)짜리「웨이터」로 일하고 있는 중년 사나이는 몇 달 전까지 백만 대군을 호령하던 월남육군참모총장「등·반·쿠옌」중장(48).
「사이공」이 공산군에 포위되고「티우」를 비롯한 고위층·부유층이 돈 보따리를 메고 줄행랑을 치는 등 국가기강과 사회질서가 말이 아닐 때 그는 사실상 월남군 총사령관으로 최후까지 항전을 계속하다가「사이공」정부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자 투항을 거부하고 다른 난민과 함께 피난선에 올랐다.
「사이공」에서 가장 청렴 결백한「스타」로 살아온「쿠옌」장군답게 지금 그의 재산은 미국인 친구들이 거두어준 5백「달러」뿐.
「사이공」탈출시에 입고 나온 장군복마저 난민촌에서 벗어버렸으니 그야말로 알몸으로 미국 땅을 밟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의 성격이 어찌나 강직한지 부정부패와 권력남용이 홍수를 이루던「사이공」에 살면서도 항상 원리원칙이나 찾고 술·담배조차 하지 않았으니 이단시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뻔한 일.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으면서도 하사관이자 단 하나뿐인 동생의 승진에 영향력을 행사한 적이 없고「스타」가 된 뒤에도「고콩」성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부친으로부터 생활비를 타다 썼다니 그의 결백과 고지식은 짐작할만하다.
어느 미국인 장성이 본국으로 귀임 하면서 무엇이든 이별선물을 하고싶다고 했을 때『구두가 낡았으니 튼튼한 것으로 한 켤레만 달라』고 말했다는「에피소드」는 너무나 유명하다.
성격이 강직한 그는「사이공」탈출도 맨 나중에야 했다. 전 주월 미군사령관「스미드」장군의 도움으로 가족 10명을 피난시킬 수 있었지만 부친은 끝내 월남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테이블」을 닦고 식사주문을 받는 일이『열 식구를 부양한다는 의무감보다 식당에 들어서면 잡념이 없어져 좋다』고. 『내 인생은 끝났다』는 이 총 없는 장군은 월남전에서 친교를 맺은「스미드」전 주월 미군사령관 등 몇몇 미국장성의 도움에 감사하면서 직업이나 의료 등 개인적인 어려움은 많지만 직접 땀흘려 살아가고 싶다고 그다운 말을 잊지 않았다. <워싱턴·포스트=본사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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