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노담화 수정 고려 안 해" 미묘한 시기 말 바꾼 아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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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安倍晋三·사진) 일본 총리가 14일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한 고노(河野) 담화를 수정하지 않고 계승하겠다고 밝혔다. 지지(時事)통신은 “아베 총리 가 고노 담화 수정에 대해 명확하게 부정하고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 한국의 고위 외교소식통은 “이달 24~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에서 한·미·일 정상회담 개최를 노리는 일본이 한국에 ‘공’을 넘긴 셈”이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12일 방한해 조태용 외교부 1차관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사이키 아키타카(齋木昭隆) 외무성 사무차관을 13일 오후 독대했다. “한국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측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는 사이키 차관의 보고가 있자 아베는 이하라 준이치(伊原純一) 아시아대양주 국장까지 불러들여 대책을 논의했다. 그 결과가 ‘고노 담화 계승 선언’이다.

 14일 참의원 예산위 첫 질문자로 나선 집권 자민당의 아리무라 하루코(有村治子) 의원은 첫 질문을 고노 담화로 시작했다. 총리 관저 측과의 ‘각본’에 따른 것이다. 아베 총리는 그동안 “(침략전쟁을 사과한) 무라야마 담화는 그대로 승계한다”면서도 고노 담화 관련 질문에는 “당시 관방장관의 담화였던 만큼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이 대응한다”는 식으로 피해나갔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내 입으로 아베 내각의 역사 인식을 밝히겠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선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쓰라린 경험을 당하신 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선 고노 담화가 있습니다. 이 담화는 관방장관의 담화이긴 하지만 아베 내각에서 ‘그것을 수정하는 것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見直すことは考えていないわけであります)’.”

 아베 총리는 그러면서도 “역사 인식은 정치·외교 문제화해서는 안 되며 역사 연구는 전문가의 손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해 과거사 사죄에 대한 미온적 태도를 이어갔다.

 이에 대해 외교부는 “아베 총리가 고노 담화를 수정할 생각이 없다고 밝힌 점에 주목하고 이를 평가한다”면서도 “오늘 발언의 진정성 여부는 앞으로 일본 정부와 정치 지도자들의 행동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다”고 밝혔다. 실제 이날 아베 총리의 발언 이후 스가 관방장관은 “고노 담화 작성 과정의 실태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며 고노 담화 검증작업에 나설 뜻을 재차 밝혔다.

 하지만 한국 정부로선 “ 오바마 미 대통령의 4월 아시아 순방 전에 한·일 양국이 관계 개선에 나서달라”는 미국 측의 재촉이 부담스럽다. 한국이 일본의 유화 제스처를 거부하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외교 당국자는 “지난해 12월 중순까지는 미국과 일본이 한 조가 돼 한국에 ‘대화의 문을 열라’고 압박했다면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이후에는 한국과 미국이 일본을 공격하는 구도였다”며 “그런데 다시 미·일 대 한국의 양상으로 변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핵안보정상회의에서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만날 가능성에 대해 “신중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유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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