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4) 전국학련―나의 학생운동 이철승<제47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고하의 암살>
반탁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던 45년12월30일. 조선독립에 앞정섰던 선각자 송진우선생이 반탁의 시련을 헤쳐나갈 경륜을 펴보지 못한채 저격범 한현자의 흉탄을 맞고 쓰러졌다.
평소에 고하를 따랐고 저격이틀전인 28일엔 경교장에서 그의 반탁전략을 경청했던 나로서는 저격소식에 눈앞이 캄캄해오는 어둠을 느꼈다.
「고하」의 암살과 관련하여 당시 항간에는 별별 풍설이 다 나돌았다.
암살범 한현자의 자백처럼 해방후 정국을 혼미하게 만든 세사람―송진우·여운형·박혜영―으로 지목하여 죽었다는 이야기가 그하나. 다른쪽으로는 「고하」가 『신탁통치를 찬성했다』또는 『3년에서 5년간의 훈정기가 필요하다고 했다』는 말과 이에 따른 오해, 그리고 공산당이 민족진영의 훌륭한 정치가인 그를 미리 꺾어버렸다는 설등이 나돌았다.
당시 상황을 회고해보면 「반탁」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민족진영내부에서 이견이 노출됐던 것도 사실이다. 김구주석을 비롯한 「임개」측은 반탁활동을 「새로운 독립운동」으로 규정하고 정국을 강경일변도로 몰고가려 했다. 미군정과는 정면으로 맞서 일전도 불사하겠다고 나섰다. 이와 같은 임정측의 반탁활동전개와는 대조적으로 이승만박사나 고하선생의 「반탁운동」방법은 침착했고 탄력성이 풍부했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미국조야인사와 오랫동안 접촉해온 이박사는 미국무성 극동국장「빈센트」가 한국의 탁치를 누차 공언해온바 있었으므로 이미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고 반탁의 효과적 대책을 비교적 차분히 세워왔다.
「고하」의 경우도 마찬가지. 그것은 「탁치반대 전국총동원위원회」가 경교장에서 열리던12월28일밤 시종 강경일변도로 치닫고 있던 임정요인들의 주장에 맞서 융통성 있는 대응책을 내세웠던 그의 주장에서 잘 나타났다. 『반탁운동은 효과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현재 우리의 처지에서 아무런 자체적인 힘과 준비도 없이 무조건 미군정까지를 적으로 돌리면 소련이나 공산계열은 미군정을 역이용해서 일시적 합작으로 나올 것이 분명하다.』 「고하」는말을 계속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민족진영은 도리없이 그들의 장기적 통일전선전략에 말려들어 공산화가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고 하는 이미 공산주의 전략을 간파하고 있는듯 했다.
나는 고하의 주장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였다.
『미국은 여론의 나라이니 만큼 강력한 운동으로 국민의사를 표시하면 족히 신탁통치정책은 변경될 수 있다.』 그는 냉철하고 조리있는 경륜을 밝혔다. 「고하」는 경교장회의를 마치고 그 이튿날 국민대회준비위원회 본부사무실에 나와 임영신·장택상·윤치영·원세동 제씨가 모인 자리에서도 전날밤의 회의상황을 보고하면서 『큰일났어! 반탁은 해야겠는데 그들은 미군정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짚신감발로 전국방방곡곡으로 내려가 새로운 독립운동을 전개한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국내치안과 국외정세에 대한 효과적 대안은 아니내고서』하는등 자기나름의 시국관을 피력했다.
고하는 탄력성 있는 현실대응책과 장기적 안목을 가진 거시적 정치인임이 분명했다.
고하선생의 정치도량은 해방후 여운형이 「건준」과 「인공」을 선포하고 손잡고 일하자고 제의한 것을 거절한데서도 잘 나타났다. 여운형이 『나도 임정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인물됨과 역량을 잘 아는데 국내에서 고생한 나와 고하만 손잡으면 국민의 뜻에 맞춰 건국을 할 수 있다』는 유혹적인 제의를 한데 대해 도리어 『조국의 독립만을 위해 기약 없이 풍찬노숙한 해외 애국선배를 모셔다가 온 국민이 국민대회를 열고 받들어서 민족의 단결을 세계만방에 과시한 뒤에 그때 가서 국민이 임정보다 몽양을 원한다면 나는 온 정성을 다하여 몽양을 받들겠소』라고 응수했다. 그러면서 고하는 애국선배지도자들을 해외에서 답국시키기 위해 미군정과 적극교섭을 벌였고 끝까지 자기희생을 통해 임정추대를 주장했다.
고하는 항상 이박사 김구주석, 그리고 김규식박사를 3영수로 모시고 국내파와 해외파의 단결과 합작을 모색했다. 그래서 국내민족세력을 규합해 한민당을 만들 때도 자기는 스스로 간사장격인 수석총무에만 머무르고 8도대표 1인씩을 총무로 앉혀 파문을 떠나 대동협력의 기반위에서 건국의 채비를 마련했다.
「하지」중장에게 한복을 처음으로 준 사람도 「고하」였다.
어느날 내가 그 이유를 물어 보았더니 「고하」는 『우리의 실정을 모르는 「하지」가 한복을 입고 있을 때 우리와 진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대답해 줬다.
그분의 주도면밀한 관찰이 없었던들 「하지」의 좌경화된 성향을 바로잡지 못했을 것이고 조병옥박사를 미군정의 경무부장에 추전, 공산당의 발호를 막거나 임정요인을 추방하려고 하였을 때 단호히 설득과 압력을 넣어 사태의 악화를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46년1월5일 고하선생의 사회장영결식에 참석해서 그분과의 관계를 회상하면서 그분의 명복을 빌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