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유주열] 중일(中日)갈등과 세계대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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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와의 수교 25주년을 기념하여 금년 초 서울의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100년 전 세계대전을 일으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가 사용하던 왕관 갑옷 의상 등이 전시되고 있었다. 마침 그 무렵 스위스 다보스 회의에 참석 중이던 일본의 아베 총리가 지금의 중일(中日)관계가 일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영독(英獨)관계에 비유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프러시아와의 전쟁(普墺戰爭)에서 잃은 땅을 벌충이라도 하듯이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물러 난 발칸 반도에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특히 보스니아 병합은 범 게르만 민족의 남하로 이어져 그 지역의 범 슬라브계 민족주의자들을 자극하였다.

왕위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부인 조피는 군사훈련 참관을 위해 불안한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를 방문 중 세르비아 출신의 청년에 의해 암살된다. 1914년 6월이었다. 황제는 배후 세력이라고 생각한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하였다.

합스부르크 왕가와 동맹관계에 있는 독일의 빌헬름 2세는 세르비아 왕국의 동맹국인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영국은 독일에 선전포고함으로써 세계대전의 막이 올랐다.

당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84세의 고령으로 66년간 재위한 장수 군주였지만 개인적으로는 불행이 떠나지 않았다. 그는 18세(1848년) 때 정신적 장애자인 백부 페르디난트 1세가 퇴위함으로써 아버지를 대신하여 왕위를 이어 받았다. 엘리자베트와 결혼 아들 루돌프를 얻었으나 멕시코 황제였던 동생 막시밀리안은 혁명군에 처형되어 가족의 슬픔이 컸다. 외아들 루돌프 황태자는 성장하면서 아버지와 의견이 맞지 않았고 결국 어린 소녀와 사랑에 빠져 정사(情死)해 버린 사건이 발생한다. 1889년 1월 비엔나에서 멀지 않은 왕가의 사냥터 마이어링(Mayerling)에서였다.

아들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엘리자베트는 상복인 검은 드레스만 입었다. 수년 후인 1898년 9월 엘리자베트는 제네바에서 무정부주의자가 휘두른 칼에 목숨을 잃는다. 빼어난 미모를 가졌으나 비운이 겹친 엘리자베트 황후에 대한 이야기는 오페라 뮤지컬 등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루돌프 황태자 사후 왕위계승자가 된 황제의 조카 페르디난트는 황실의 시녀와 사랑에 빠져 이른 바 귀천(貴賤 morganatic)결혼을 고집함으로써 황제를 크게 실망시켰다. 이러한 사정으로 페르디난트 내외의 대외활동이 금지되었다가 결혼 14년 만의 공식 행사에서 변을 당한 것이다.

네이비블루의 대원수복에 붉은 망투를 걸친 근엄한 표정의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대형 초상화 앞에서 100년 전 황제의 선택이 달랐더라면 세계대전을 피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오늘 날 배타적 민족주의에 쉽게 빠지기 쉬운 중일(中日)관계가 개선되기 위해서는 지도자들의 선택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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