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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싱키」정상 회담 이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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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헬싱키」에서 열리는 전 구주 안보협력회의를 고비로「유럽」국제정치사에는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졌다.
흔히「빈」회의와「베르사유」평화회의에 비유되기도 하는「헬싱키」회의는 1917년의 공산혁명이래「크렘린」이「유럽」에서 획득한 거의 모든 것을 서방측에 의해 추인 받았다는데에 그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크렘린」은 자국을 공산화한데 이어 2차 대전을 고비로 동구를 적화하고 나서 최대의 숙적이던『강력한 독일』마저 양분시키는데도 성공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일단 장악한 동구의「세력권」을 어떻게 하면 계속 확보하느냐 하는 것이「크렘린」역대 수뇌들의 일관된 집념이었다.
동구「세력권」을 서방세계와의 공감대로부터 완전히 차단하고, 동구권 내부의 민족주의적·자유주의적 소인을 철저히 말살하는 동시에「유럽」전체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배제하면서 서구의 약화와「핀란드」화를 촉진하자는 것이 이를테면 소련외교의 목표였던 것이다.
이러한 목표는 30년 전의「얄타」협약에 의해 어느 정도 접근되는가 싶다가 전후의 냉전으로 인해 다시금 후퇴, 결국 70년대에 들어와 소련의 숙망이던「유럽」분할과 서방동맹의 약화구장이 전구주적 규모에서 추인된 셈이다.
따라서「헬싱키」회의가 소련 외교의 일방적 승리라고 혹평하는데에는 그럴만한 양거가 있는 것이다.
서구는 긴장완화라는「대환상」에 도취한 나머지 동구권 내의 자유화 운동이나 인간회복에의 열망에 도의적인 배신으로 답했을 뿐 아니라, 동구의 주권을 침해하는「브레즈네프」의 이른바「제한 주권론」을 승인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서구가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신념을 포기한 것이라는 비만의 양거이기도 하다.
반면, 그 반대급부로 서구측이 자신의 안정을 약속 받은 것도 아님은 분명하다.
「국경의 불가침」이나「내정부 간섭」이란 합의사항은 서방측의 동구 접근이나 동서독 통일을 가로막는데에만 효과가 있을 뿐,「나토」를 위태롭게 하는「이탈리아」나「포르투갈」공산당에 대한 소련의 혁명지원을 막는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보합의의 성사는 또한 서구와 나토권 내부에 남북 대립의 분열증세를 심어놓았다. 서구의 북쪽 제국은 소련과의「데탕트」에만 급급한 나머지「말타」「터키」등 지중해 연안국들의「중소국 이익」을 외면했을 뿐 아니라 미국과의 전통적인 유대에도 약간의 금이 가게 했다.
한편 소련의 양보라고 간주될만한 것이라곤 국경의 평화적 변경의 가능성과 군사연습의 사전 통고, 그리고 동서간의 인적교류와 정보교환 약속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러한 합의란 어디까지나『고도의 의사표시』에 불과한 것인 만큼 소련이 과연 동구의 문호를 쉽사리 개방할는지는 심히 의심스러운 바가 있는 것이다.
결국「유럽」안보회의는「나토」의 약화와 합께 소련의 서쪽 세력권을 안정시킨 대신, 동「아시아」로의『긴장의 이동』을 초래했을 뿐이라는 평을 면하기 어렵다.
소련은 이미 일본에 대해「아시아」집단안보안을 강청하고 있다고 보도된 바 있다. 이것은 물론 일본을 미국과 중공으로부터 떼어내「아시아」반수체제의 주축인「미·일 안보」와「일·중공 접근」을 둔화시킴으로써 미국과 중공을 고립시키려는 복안이다.
이에 대해 중공은「아세안」제국을 소련보다 한발 앞질러 끌어들이고 미·일의 군사력을 긍정적으로 간주하는 등 적극적인 반소외교를 강화하고 있어「헬싱키」이후의「아시아」정세는 더한층 복잡해질 것으로 예측된다. 북괴는 소련의「집단안보」가 혹시 한반도 현상의 유지를 초래하지나 않을까 해서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듯한 눈치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자주국방에 병행해서 원숙한 외교역량을 발휘, 소련 외교의「아시아」진출에 대해 기민한 방비책을 강구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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