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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도안·귤렌 싸움에 골병 드는 터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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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누구도 대놓고 욕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굴 가리키는지 누구나 다 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와 저명한 종교운동가인 페툴라 귤렌의 갈등 양상이다. 양 진영의 권력투쟁으로 터키가 골병이 드는 양상이다.

 10일엔 미국에 머물며 대응을 삼가던 귤렌이 직접 나섰다. 그가 파이낸셜타임스(FT)에 “터키 민주주의를 구할 새 헌법이 필요하다”는 제목의 실명 기고를 했다. “그로선 이례적인 정치 논평”(로이터)을 한 것이었다.

 그는 에르도안의 권력 장악을 한때 터키를 지배했던 군부에 비유했다. 인터넷 통제 강화와 사법부와 정보기관에 대한 인사권 강화 등 에르도안의 최근 조치들을 거론하곤 “행정부 내 소그룹이 이 나라를 볼모로 몸값을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한때 권세를 누렸던 군부가 행정부로 대체됐다”며 “환원주의자들이 종교를 내걸고 권력을 추구하는데 이는 이슬람의 정신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800단어에 이르는 그의 글 어디에도 에르도안은 없었다. 대신 ‘행정부 내 소그룹’ ‘환원주의자’란 표현이 동원됐다. 그러나 문맥으로 말하는 바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에르도안이 귤렌을 비난하면서 ‘거짓 예언가’ ‘공허한 설교가’ ‘바이러스’ ‘모반자’라고만 할 뿐 거명하지 않는 것과 유사했다.

 에르도안과 귤렌은 한때 정치적 동반자였다. 에르도안이 2003년 집권해 터키의 오랜 지배층이었던 군부를 몰아내기까지 협력했다. 에르도안에겐 1980년대부터 검경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귤렌의 도움이 절실했다. 편의에 의한 연대였다. 그럭저럭 굴러가던 둘 사이에 갈등이 벌어진 건 2010년 정보기관장 임명을 두고서였다. 에르도안이 상의 없이 자기 측근을 기용하자 귤렌파는 배신당했다고 여겼다. “연대의 대가는 다 치렀다”는 에르도안과 “미흡하다. 공동정권은 이어져야 한다”는 귤렌파 사이의 시각차가 있었다. 군부는 이미 제압된 상태였다. 눈치 볼 대상이 사라진 만큼 갈등 양상은 노골적이었다.

 지난해 여름 반정부 시위를 두고 검경이 유화적 태도를 보이자 이번엔 에르도안이 펄쩍 뛰었다. 11월 귤렌파 교육운동의 본거지랄 수 있는 입시학원 폐쇄 카드를 꺼내 들었다. 곧 검경이 에르도안의 집권여당인 ‘정의개발당(AKP)’의 대형 뇌물수수 사건을 수사하며 장관 아들 3명을 체포하는 일이 벌어졌다. 에르도안은 “해외에 있는 책략가들이 배후에 있는 어려운 음모”라고 반발했다.

 그 이후엔 “(세속과 종교집단의 갈등을 다룬) 댄 브라운의 소설에서나 가능함 직한 일들”(알자지라)이 터키에서 벌어지고 있다. 에르도안이 검경 내 귤렌파를 몰아내고 검경과 사법부에 대한 인사권을 강화하는 조치를 내놓자 에르도안 부자로 추정되는 두 사람이 현금 10억 달러를 은폐하는 내용 등의 전화 감청 기록이 연거푸 공개된 게 그 예다.

 둘의 충돌이 국경을 넘나들기도 했다. 에르도안이 최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미국에 머무르는 귤렌의 추방 문제를 논의했으며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고 주장하면서다. 백악관은 “부정확한 얘기”라며 “오바마 대통령은 법의 지배에 의한 건전한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반박했다. 동조한 게 아니라 비판했다는 암시였다.

 전문가들은 이런 갈등 상태가 3월 지방선거 혹은 8월 대선 때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관측한다. 그 사이 터키의 국가적 이미지는 실추하고 있다. FT는 “신흥국의 모범으로 여겨졌던 터키가 경상수지 적자, 부채 증가와 맞물려 케케묵은 정권이란 취약점을 드러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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