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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 정해 놓고 압박 마라, 그건 너무나 한국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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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면

토니 페르난데스 엡솜 칼리지 말레이시아 이사장이 지난달 20일 쿠알라룸푸르의 엡솜 칼리지 캠퍼스에 아시아 각국 기자를 초청한 자리에서 축구 실력을 뽐냈다. 이곳은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승인 받은 3개의 인조잔디 경기장이 있다. 그는 잉글랜드 챔피언십리그(프로축구 2부) 퀸즈 파크 레인저스(QPR) 구단주이기도 하다.

토니 페르난데스(50) 에어아시아 회장. 국내에는 박지성 선수가 잠시 몸 담았던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 퀸즈 파크 레인저스(QPR·현재는 2부리그인 잉글랜드 챔피언십 리그로 강등) 구단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항공사 회장에다 영국 프로축구단 구단주라고 하니 말레이시아의 무슨 대기업 오너 2세쯤 되는 걸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는 자수성가한 기업가다. 아시아 최초이자 최대 저가항공사인 에어아시아는 그가 빚더미 국영기업을 인수해 만든 회사다.

1,2 페르난데스 이사장은 아시아 8개국 기자를 불러 미디어 투어 행사를 진행했다.

이전엔 비록 음반회사(워너뮤직 동남아 법인 부회장) 경영진이긴 했지만 그래봐야 월급쟁이였다. 2001년 1월 몸담고 있던 워너 뮤직의 모회사인 타임워너가 AOL에 합병되자 그는 스톡옵션을 처분한 돈으로 그해 12월 에어아시아를세웠다. 남들은 모두 무모하다고 했지만 그는 취항 첫해부터 흑자를 내는 등 보란듯이 성공했다.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2010년 그를 ‘아시아 최고의 기업인’으로 선정했다. 그가 이번엔 교육분야에서 또 한번 무모한 도전에 나선다. 모교이기도 한 영국 엡솜 칼리지를 말레이시아에 세운 거다. 지난달 20일 쿠알라룸푸르 엡솜 칼리지 캠퍼스에서 그를 만났다. 이후 e메일을 여러 차례 주고 받으며 추가 인터뷰를 했다.

페르난데스는 1976년, 그러니까 22년 집권하며 말레이시아 부흥을 이끈 마하티르 모하마드가 총리에 취임하기 5년 전인 12살 때 영국으로 조기 유학을 떠났다. 한때 말레이시아가 영국 식민지이긴 했지만 당시 영국 유학은 누구나 쉽게 부릴 수 있는 사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인도 출신 의사 아버지와 타파웨어(미국 생활용품 브랜드)를 말레이시아에 처음 들여온 사업가 어머니의 교육열이 그를 영국으로 이끌었다. 그는 “다른 많은 아시아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부모님 역시 내가 최고의 교육을 받길 원하는 마음에 유학을 보냈다”고 말했다. 그가 다닌 학교가 바로 엡솜 칼리지다. 유학 생활은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비싼 항공료 때문에 방학 때도 집에 갈 엄두조차 못냈던 기억은 그를 저가항공사 설립자로 만들었고, 그가 경험한 우수한 영국식 교육을 아예 모국에 옮겨놓고 싶다는 열망은 엡솜 칼리지 개교로 이어졌다. 다음은 일문일답.

-1970년대에 영국 유학을 가다니. 아버지가 의사였다고 알고 있는데, 집이 부유해서 가능했을 것 같다.

“글쎄. 아버지가 의사였다는 건 맞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한다는 이상(理想)에 자신의 운명을 맡긴 사람이다. 주말이면 쿠알라룸푸르에 있던 자기 병원에서 무료진료를 봤다. (※그는 국내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아버지를 ‘어떤 의미에서 공산주의자 의사’라고 정의한 바 있다. ) 부족한 건 없었지만 부유하게 자라지도 않았다. 다만 부모님은 나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켜주기 위해 유학을 결정했다.”

-당시 말레이시아에서 영국유학이 흔하지는 않았을텐데.

“아주 없지는 않았다. 정부가 전액 장학금을 줘 수천명의 학생을 영국과 호주·미국 등으로 유학 보냈다. 영국에 처음 갔을 때는 말레이시아 초등학교 때 받았던 교육과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준이 훨씬 높았고, 경쟁도 매우 치열했다.”

3 쿠알라룸푸르의 항공 조종사 훈련용 비행 시뮬레이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페르난데스 회장. 그는 에어아시아 CEO이기도 하다.

-지금은 어떤가.

“솔직히 말레이시아 교육 제도는 38년 전 내가 유학을 떠날 당시보다 후퇴했다고 생각한다. 정부가 새로운 교육 청사진을 내놓은 것도 이런 문제의식이 바탕이 됐다. 대표적인 게 국제학교 규제를 없앤 거다. 정부는 지난 2006년부터 국제학교 정원의 40%까지 말레이시아인이 들어갈 수 있게 바꿨다. 그전까지는 외국인이나 해외에서 3년 이상 거주한 사람에 한해서만 입학이 가능했다. 심지어 지난 2012년부터는 아무 규제없이 내국인이 자유롭게 국제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 말레이시아를 교육 허브로 만들기 위한 정부의 경제 개혁 프로그램 중 하나다.”

-엡솜 칼리지 말레이시아 캠퍼스도 그런 교육 허브 정책의 일환에서 만들어진 학교인가.

“정부와 특별히 교감해서 만든 건 아니다. 하지만 엡솜 칼리지를 아시아, 아니 세계 인재가 몰려드는 최고의 학교로 키우겠다는 생각은 결국 정부 정책과 맥락을 같이 하는 걸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학교 설립을 구체적으로 구상한 건 몇 년 안됐지만 늘 머리 속에 교육 분야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아시아는 이미 인적 교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태국 사람이 싱가포르에서 공부하고 말레이시아에서 일하는 게 더 이상 신기한 일이 아니다. 앞으로 이런 교류는 점점 더 활발해 질 거다. 엡솜 칼리지를 아시아 교육 허브의 중심에 세우고 싶다.” (※그는 엡솜 칼리지 미디어 투어 프로그램에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 8개국 기자를 초청했다. )

4 2013년 5월 에어아시아의 일일 승무원으로 나선 영국 버진그룹 리처드 브랜슨 회장으로부터 서빙받는 페르난데스 회장. 항공사와 포뮬러 원(F1) 레이싱팀을 모두 갖고 있는 두 사람은 2010년 F1 당시 자신의 팀 승부를 걸고 내기를 했다. 진 쪽이 상대 항공사에서 일일 승무원을 하기로 말이다.

-영국·미국에 명문 학교가 즐비한데, 이게 가능할까.

“물론이다. 우선 실용적인 측면에서 설명해보자. 우선 비용이 저렴하다. 영국 본교의 3분의 2 정도 비용으로 똑같은 영국 교육을 경험할 수 있다. 또 지리적 이점도 있다. 말레이시아 캠퍼스는 아시아 각국에서 접근성이 좋다. 태국·싱가포르·홍콩·브루나이·베트남 등에서는 1시간 거리, 한국에서는 6시간 걸린다. 한국 입장에선 다른 아시아 국가보다는 멀지만 영국까지 가는 것보다는 훨씬 가깝지 않나. 국제공항에서 10분 거리에 학교를 설립한 것도 이런 이유다. 어디에서 온 학생이든 집에 좀 더 자주, 편하게 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말레이시아에 이미 많은 국제학교가 있다. 경쟁력이 있을까.

“현재 말레이시아 전역에 70개가 넘는 국제학교가 있다. 하지만 자신있다. 제일 우선으로 꼽을 수 있는 강점은 규모다. 20만2342㎡(6만1208평)이나 된다. 사실 학교로 돈만 벌 생각을 하면 규모를 작게 하는 게 맞다. 하지만 난 정말 제대로 된 교육을 시키고 싶다”

-제대로 된 교육이라는 게 뭔가.

“학생 맞춤형 교육이다. 학교는 학생 개개인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수학은 못하는 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있는 반면, 미술에 소질은 없지만 천부적인 운동 신경을 가진 사람이 있다. 이들을 모두 같은 수준으로 가르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수학은 못하고 음악은 잘하는 학생에게 수학은 1, 음악은 10의 강도로 가르치는 거다. 이를 위해 같은 과목을 배워도 가르치는 수준은 학생에 따라 다르다. 알파벳도 모르는 학생과 고급 회화 능력까지 갖춘 학생을 같은 수준으로 가르칠 수는 없다.”

5 지난해 7월 에어아시아의 부산-쿠알라룸푸르 노선 취항 기념 기자회견장에 참석한 박지성 선수와 페르난데스. 박 선수는 2012년 7월부터 약 1년간 페르난데스 회장이 구단주로 있는 퀸즈 파크 레인저스(QPR)에 몸을 담았다.

-또 다른 경쟁력이 있을까.

“영국 본교보다 오히려 더 세계적인 시각을 기를 수 있다. 영국 엡솜 칼리지는 영국인이 대부분이다. 영국 문화와 영국 생활에 대해서는 알 수 있지만 그뿐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시아 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학생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다. 영국에서 영국학생하고만 생활한 사람과 말레이시아에서 60개국 학생을 접한 사람 중에 누가 더 글로벌 한 인재가 될 수 있다고 보나.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아시아 최고 학교가 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굉장히 한국적인 질문이다. 목표를 정해놓고 무조건 압박하는…. 한국식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앱솜 칼리지 개교 자체가 하나의 도전이다. 최고가 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 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다. 아시아 학교의 진짜 저력이 뭔지 꼭 보여주고 싶다. 아직도 서양에서는 아시아인은 창의력이 떨어진다고 여긴다. 이런 인식을 개선하고 싶다. 창의력을 가진 학생을 키워내고 싶다. 이 학교 출신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게 할 거다. 아시아인도 할 수 있다는 걸 세계에 보여주겠다.” (※그의 좌우명은 ‘믿을 수 없는 일을 믿자’다. 그의 자신감은 이렇게 늘 불가능에 도전하고 결국 성공한 경험에서 나왔다.)

-한국에 대해 잘 아는 것 같다. 한국 교육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게 있나.

“한국은 정말 놀라운 나라다. 모든 걸 다 가졌다. K팝·정보기술(IT)·패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아시아를 선도하고 있다. 요즘 말레이시아에서는 한국 가수 패션을 따라하는 젊은이를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 교육은…, 잘 모르겠다. 대학 입시에 대한 압박이 많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런 교육 속에서 창의력을 키우는 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혁신적인 생각을 하려면 표현의 자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한가. 의문이다. 사실 그런 면에서 한국 학생에게 앱솜 칼리지에 오라고 권하고 싶다.”

-자녀 교육을 어떻게 시켰는지도 궁금하다.

“딸 하나, 아들 하나가 있다. 딸은 영국 엡솜 칼리지 본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했고, 아들은 이번 9월에 개교하는 엡솜 칼리지 말레이시아에 원서를 냈다. 딸이 변한 것만 봐도 엡솜 칼리지가 훌륭한 학교라는 걸 알 수 있다. 솔직히 공부엔 관심없고 문신이나 하고 다니길래 걱정을 많이 했다. 대학에 못갈 줄 알았다. 학교가 내 딸을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줬다.”

쿠알라룸푸르=전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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