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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바꾸는 체인지 메이커] 좀도둑서 사업가로 인생역전 … “자선보다 자립” 세계 전파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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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호 24면

‘빅 이슈’ 창업자인 존 버드는 “자선은 지옥으로 가는 포장도로”라며 선의와 ‘좋은 척’하는 리버럴한 태도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관리가 아닌 치료의 관점에서 노숙인들의 정신적인 문제 해결을 돕고 경제적 자립과 사회적 자긍심 회복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 INSP 블로그]

서울 시민이라면 대학가나 광화문 같은 번화가의 지하철역 입구에서 빨간 조끼와 모자를 착용한 잡지 판매원과 마주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들이 판매하는 잡지에는 종종 가수 이효리, 배우 최강희 같은 유명 연예인이 표지 모델로 등장한다. 노숙자들의 자립과 자활을 위해 창간된 대중문화 잡지 ‘빅 이슈’(The Big Issue·작은 사진)다. 이를 파는 ‘빨간 조끼 판매원’들이 바로 노숙자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들을 ‘빅판’이라 부른다. ‘더 빅 이슈 코리아’라는 사회적 기업이 운영하는 이 잡지의 모태는 영국이다. 유명 패션잡지들처럼 글로벌 네트워크를 자랑한다. 모두 10개국에서 14종의 ‘빅 이슈’가 발매 중이다. 이를 본떠 창간했거나 기사 제휴를 맺은 세계 길거리 매체만도 40개국 120여 종에 이른다. 이들은 세계노숙인자립지원신문잡지협회(INSP)라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결성해 콘텐트를 공유하고 해마다 국제 콘퍼런스도 연다.

<28> 노숙인 자립 돕는 잡지 ‘빅 이슈’ 창간한 존 버드

‘빅 이슈’ 영국판 표지.

1991년 영국에서 ‘빅 이슈’를 창간했고 INSP의 창립을 주도한 이는 존 버드(68)다. 그의 이력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점은 스스로가 노숙인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자립에 성공했고, 사회적 이슈와 비즈니스를 결합하는 것이 아직 낯설던 시절에 빅 이슈를 창간해,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회적 기업 중 하나로 키워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해리 포터’ 작가 조앤 롤링, 마돈나, 데이비드 베컴 같은 세계적 명사들이 이 잡지의 표지 모델을 자청했다. 영국에서만 매주 13만~15만 부가 팔린다. 2010년 기준으로 5000명 이상의 영국 노숙자들이 빅 이슈 판매를 통해 자립에 성공했다고 한다. 덕분에 버드는 ‘영국의 501개 자선단체도 못한 일을 해냈다’는 평을 받으며 사회적 기업 분야의 세계적 리더가 됐다. 공을 인정받아 95년 대영제국훈장(MBE)을 받았고, 2004년에는 BBC가 진행한 투표에서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런던의 살아있는 전설’로 선정되기도 했다.

버드는 특유의 신랄하고 유머러스한 연설로 유명하다. 적지 않은 나이지만 전 세계를 돌며 빅 이슈 판매 촉진과 사회적 기업가정신 확산을 위해 정력적으로 활동한다. TV 프로듀서 출신인 세 번째 아내는 그보다 24세 연하다. “나보다 약간 젊을 뿐”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2011년 영국 ‘가디언’지 인터뷰). 더 빅 이슈 코리아 관계자는 그에 대해 “사회운동가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사업가 내지 장사꾼 같은 면모가 강하다”고 전했다. 어쩌면 이야말로 그가 정치·사회적으로 매우 민감한 이슈인 영국 노숙인 문제의 복판에 뛰어들어, 부침이 심한 미디어업계에서 무려 23년 동안이나 나름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일지 모른다.

버드는 런던 노팅힐의 슬럼가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집세를 못 내 처음 노숙인 생활을 시작한 것이 다섯 살 때였다. 7세부터 3년 동안은 고아원에 맡겨졌다. 이후에도 불안정한 주거 환경 속에 자연스레 범죄의 길로 빠졌다. 좀도둑질을 하다 13세 때 처음 감옥에 갔다. 온갖 일을 전전하다가 20대에 이르러서야 공부를 시작했다. 출판업자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것은 서른이 한참 넘어서였다. 나름대로 작은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을 때 특별한 제안을 받았다. 세계적 화장품 브랜드 ‘더바디숍’의 공동 창업자인 고든 로딕이 “뉴욕에서 판매되는 노숙인 잡지 ‘스트리트 뉴스’ 같은 것을 영국에서도 만들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한 것이다. 버드가 45세 때였다.

안 그래도 당시 버드는 자선 위주의 노숙인 관리 방식에 불만이 많던 터였다. 그는 영국 ‘데일리 메일’과의 인터뷰에서 “정부나 각종 단체의 자선은 찔끔찔끔 먹이를 줌으로써 그 덫에 영원히 걸리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노숙인이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자기 삶의 주도권을 찾도록 돕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빅 이슈를 애초부터 ‘공짜가 아닌, 그렇다고 너무 비싸지도 않은, 품질로 승부하는 제대로 된 잡지’로 만들기로 한 이유다.

로딕의 투자를 받아 시작한 사업은 쉽지 않았다. 노숙인들은 “우리를 착취하려 한다”고 반발했다. 하지만 버드는 “공짜는 없다”고 선언한 뒤, 외려 각종 행동 수칙을 지켜야만 판매원으로 활동할 수 있게 했다. 판매 중 술을 마셔서는 안 되고, 당당하며 친절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등의 것들이다. 이에 동의한 노숙인들에게는 잡지 10권을 공짜로 줬다. 이를 팔아 생긴 수익으로 다시 잡지 10권을 정가의 절반 값에 살 수 있도록 했다. 판매 수익의 절반을 노숙인이 가져갈 수 있게 한 것이다.

버드는 아울러 노숙인이 존엄성과 자긍심을 되찾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데일리 메일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노숙인의 90%가 알코올과 약물 문제가 있다. 그중 90%는 그걸 통제하지 못한다”며 “노숙인 문제는 관리가 아닌 (정신)치료의 관점에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빅 이슈는 노숙인이 잡지 판매를 통해 소비자와 동등한 ‘시민’임을 인식하고 사회적 소속감을 갖는 것을 중시한다. 버드가 2003년 ‘홈리스 월드컵’을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대회에는 매해 70여 개국의 노숙인들이 참여해 유대를 다지고 서로를 격려한다.

버드는 2010년 7월 빅 이슈 코리아 발간기념 방한 당시 강연에서 “창간 1년 만에 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던 건 철저히 비즈니스적인 접근을 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영국 빅 이슈가 전국을 5개 권역으로 나눠 지역판을 따로 내고, 지난해에는 콘텐트를 유료 구매할 수 있는 스마트폰 앱을 출시하는 등 변신을 거듭하는 이유다.

물론 버드의 이런 방식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장’과 ‘자립’을 강조하는 그의 방식이 정부의 복지 책임을 희석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확고하다. 지난 방한 당시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정부 지원만으로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모든 이들에게 기회를 줄 수 없다”며 “그 차이를 메우는 것이 바로 사회적 기업이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나는 창업지원재단에서 일하는 까닭에 사회적 기업가들을 만날 기회가 종종 있다. 그들 대부분이 ‘선한 의도’와 ‘영속 가능한 비즈니스’를 조화시키는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버드의 사례는 사회적 기업 역시 말 그대로 ‘기업’이며, 외려 일반적인 창업가들보다 훨씬 강력한 신념과 야망을 가져야 함을 보여준다. 직원들의 월급을 줄 수 없다면 결국 어떤 뜻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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