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파라과이」의 목재 왕 최진곤씨(2) &갑작스런 목재 불경기로 한때 고전|화목으로 쓰는「와탐부」개발…미 목재상에 납품|3대의 제재기로는 주문 따를 수 없어 원주민 공장에 하청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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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아순시온=김재혁 특파원】최씨가 경영에 참여할 즈음의 회사사정은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제재 기는 차려 놓았지만 운영자금이 바닥나 곤란을 겪은 데다가 미송이나 나왕을 제재하던 경험으로는「하드·우드」로 제 치수를 내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얇은 톱날이 휘는 일이 잦아 톱날 손질에도 애를 먹었다. 겨우 나무질을 알게 되자 뜻 아니한 목재불경기가 들이닥쳤다.

<조합원에 반년 이상 배당 못 줘>
대외수출의 20%이상을 점하는「아르헨티나」의 불경기로 수출길이 끊기다 시피 되자 생산과잉은 가격폭락을 불러일으켜 도산하는 업체가 늘어났다. 최씨의 공장도 예외는 아니어서 조합원들이 6개월 이상 거의 한푼의 배당도 받지 못할 정도였다. 1년 동안이나 계속된 불경기는 68년 6월부터 풀리기 시작하여 차차 품삯 일거리가 들어왔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파라과이」목재업계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파라과이」정부에서 목재인 연합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원목수출을 금하고 가공품에 한해서 수출을 허가하는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통나무를 수출하던 업계에서는 제재소에서 치수대로 제재하거나 가구부품을 만들어 수출하게 되자 국내산업의 보호와 가격앙등의 이중효과가 나타나게 되었다.
제재소의 경기도 차차 회복되어 갔는데 최씨의 설명으로는 그 때까지「파라과이」목재업계는「스트로에스네르」대통령에 반대하는 야당세력이었기 때문에 정부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가 오랫동안 끈질긴 접근으로 봉쇄조치가 풀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파라과이」정세에 비교적 밝았던 최씨는 미국 원 조처의 고문관을 통해 대미수출 길을 찾았다. 이 때 손이 닿은 업체가 미「오하이오」주「콜롬버스」시의「프램턴」회사부사장 「웹스터」씨를 통해 화차바닥에 쓰이는 판자납품을 추진하게 되었다. 마침 미원조처의 주선으로 목재 대미수출을 위한 사절단이 미국에 파견되었을 때 최씨도 단원으로 방미, 가져간 각종「샘플」을 30여 개소의 가구공장 등에 선보였다. 그러나「웹스터」씨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변을 당하자 이「프램턴」회사와의 상담은 깨지고 말았다.
최씨는 71년 미국목재상이「파라과이」에 진출할 때까지 3년 동안 삯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미「테네시」주「모리스타운」시에 있는「버클라인」이라는 회사는 의자전문「메이커」로 1주일에 의자 1만개를 생산하는 세계최대의 규모. 그 때까지 동남아에서 원목을 수입하여 가공해 왔으나 원목가격과 수송비의 앙등으로「파라과이」시장을 개척하려던 참이었다.

<처음 3년 동안은 삯일로 생활>
최씨는 이 회사의 중간상인을 통해「와탐부」로 만든 1차 가공품을「샘플」로 납품하여 계약하는데 성공했다. 「와탐부」라는 나무는「하드·우드」계열의 딱딱한 나무로 가구 만드는데 적격. 색깔이 마치 자작나무같이 희고 광택이 있다. 남미지방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아 화목으로 쓰는 것이 고작이었다. 최씨는 원주민업자와 경쟁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값싸게 원목을 구할 수 있는 이점을 노려.「와탐부」개발에 착안했던 것.
최씨는 우선 원목을 확보하려고 제재소에서 32㎞ 떨어진「코리엔티나」지방에 4만2천㏊의 산만을 확보했다. 우리나라 평수로 따지면 1억2천6백만 평이나 되어 그 넓이는 얼른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 1㏊안에 보통 수령 30∼50년 생의 아름드리나무가 10그루 서 있어 모두 40만 그루 이상의「와탐부」가 하늘을 덮고 있었다. 그러나 산과 나무를 몽땅 구입한 것이 아니라 그 벌채 권만을 사들여 한 그루를 자를 때마다 3백「과라니」(약 9백원)를 산 주에게 지불하는 방식.
산 판에서 벌채하는 인부는 원주민 50여명. 노동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에 직접 고용하지 않고 도급제로 쓰고 있다. 전기톱 등 기계를 전혀 쓰지 않고 도끼로 찍어내는데 하루 40그루 정도 벌채하고 있다.
이 지방은 날씨가 몹시 더운데다가 맹독을 가진 독사가 우글거려 어려움이 많다는 것. 개중에는 아직 동화되지 않은 「인디언」들이 화살로 공격해오는 일도 있어 경비원들이 항상 총을 들고 경계해야 한다. 또 나무가 쓰러질 때 깔려 다치는 안전사고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더위·「인디언」습격 등 애로도>
최씨가 산 판에 투입하고 있는 장비는「트랙터」5대와 6t「트럭」5대. 벌채한 나무를 길까지「트랙터」로 끌어내면「트럭」1대가 하루 2회 왕복할 수 있다. 1년 동안 벌채한 면적은 5백㏊정도. 입구에서 겨우 9㎞정도 파고들었을 뿐이다. 다행히 제재소가 국도 변에 위치하여 교통은 편하지만 워낙 수송비가 많이 먹혀 원목가격의 8배가 운임으로 나가고 있다.
1그루에 3백 개 정도를 제재할 수 있는 원목을 제재소까지 옮겨 놓는데 드는 비용은 약 2천4백「과라니」(7천2백원)나 제재 후 수출가격으로 따지면 2만3천「과라니」(약 7만원)로 「마진」은 높은 편.
최씨는 대미수출 첫 1년 동안 약 1백만「달러」어치를 수출했는데「테네시」주「뉴포트」시의「우드·프로덕트」회사에서도 주문을 해 왔다. 최씨가 수출한 목재는 미국 안에서 큰 호평을 받아 그의 상표인 CPC는 신용을 얻게 되었다. 그 비결은 정확한 치수로 제재하여 방충을 위한 약품처리와 건조처리를 잘한 데 있었다.
제재과정은 한국 안의 보통 공장에서 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만 약품 처리 후 적어도 40일 동안 공기건조를 시키고 출고 전 검사를 철저히 하여 불량품을 가려내고 또한 선적까지의 모든 신용장 조건을 이행하여 CPC 상표의 신용을 지켰다.
이 때의 생산능력은 매월 6백입방m. 3대의 제재기로는 주문을 따를 수가 없어서 원주민공장에 하청까지 주어야 했다. 이민 6년만에「파라과이」제2의 제재소로 성장했고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조합원들의 단결이 뒷받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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