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해로 답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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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오늘 하오2시, 일본에서 가져온 조그만 한 척의 목선이 인천항을 떠났다.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지만 은하수로 가려는 건 아니다. 이 배는 10명의 우리 어부가 남쪽으로 노를 저어 서·남해안의 29개 항구에 기항한 뒤 한 달만에 김해에 닿는다. 이 배가 들러 머무를 항구는 모두가 조선왕조시대의 조세인 미곡을 실은「조선」이 경 창에 이르는 동안에 쉬어 가던 곳이다.
아산 만에서는 청일전쟁을 회상하고, 태안의 안흥량 관장항의 험난한 수로에서는「조졸」의 신고에 눈물짓고, 석취와 파도를 피하려고 운하를 파던 단상의 슬기에 감탄한다. 또 고군산도에서는 강둔의 나라의 문호를 두드리던 철갑의「이양선」·「황당선」을 그려보고, 명량·노량에서는 충무공의 대첩에 고개를 숙이는 등 연안에 새겨진 굵직한 일만도 하나 둘이 아니다.
그러나 이 배가 가장 큰 목적으로 삼고 있는 바는 절령도 앞으로 희미하게 바라보이는 대마도를 향하여 부산을 떠난 뒤 북 구주에 이르는 보름 동안의 항로에 있다. 부산에서 이 배의 노를 이어받을 일본인들은 아득한 옛날에 이 땅에서 그 곳으로 이어지던 물결을 몸소 타 보려는 것이다.
패전과 동시에 신국 일본의 허무맹랑한 고대사는 역사학으로서 설 땅을 잃었다. 그들의 사서에 보이는「임나」가 왜왕의 세력권에 속했었다는 일본의 한 지배 설도 학설이라고 들고나올 수는 없게 되었다. 패전은 일본의 고대사 연구에도 자유의 바람을 몰아왔다.
일본의 국가와 민족의 기원을 동북「아시아」기마 민족의 일본정복에서 찾아야 한다는 설이 나오게 되었다. 한반도와「아시아」대륙을 일본과 비교·대조함으로써 정치·군사·사회·문화 등 각 방면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에 부합한다는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되어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한편 일본에서 최초로 문자를 쓰고, 도 작을 전하고, 토기·철기를 만들고 불교·유교를 가르치고, 불상을 건네준 한반도나 지나 대륙에서의 도래 자, 즉「귀화인」을 모르고는 일본고대문명을 풀어 나갈 수 없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 문화·기술의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법전 편찬이나 세제 등 정치·경제 방면에도 새로운 지식을 가지고 진출하여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에 크게 기여한「귀화인」의 문제야말로 그들 고대사의 관건이 되는 것이다.
이번에 장도에 오르는 목선은 신라 때의 선형토기에서 본을 떠서 근2천년 전 삼한시대의 배를 재생시켜 본 것이다. 이 배가 북 구주에 닿는 순간 일본 고대사가, 또는 당시「귀화인」의 도래경위나 한-일간의 교류관계가 하루 아침에 밝혀지지는 않겠지만, 모처럼 현해탄에 문화의 물결을 일게 해 줄 이 일엽편주의 행적을 우리는 눈 여겨 지켜보며 그 성과에 기대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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