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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련한 푸틴, 오바마에 또 판정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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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군복에 표지를 부착하지 않은 무장병력이 4일(현지시간) 크림반도 심페로폴 인근 우크라이나 군기지 출입문 앞에서 경계를 서고 있다. 지난달 28일부터 크림반도에 주둔 중인 이들은 러시아군으로 추정돼 왔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그들은 현지 자경단으로 러시아군과 관련없다”며 “군대 파병은 최후의 수단”이라고 말했다. [페레발노예 로이터=뉴스1]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4일(현지시간) 기자회견으로 우크라이나 사태는 새 국면을 맞았다. 러시아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의 긴급 회동을 수락했다. 우크라이나 과도정부는 러시아와 장관급 대화를 할 예정이다. 아르세니 야체뉵 임시총리는 “미흡하지만 첫걸음”이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러시아 제재를 논의하던 국제사회는 협상을 통한 해결에 무게를 싣는 분위기다. 닷새 동안 러시아 국기가 내걸렸던 동부 도네츠크의 정부청사엔 우크라이나 국기가 게양됐다. 모든 게 푸틴의 한 시간짜리 기자회견 후 짜인 판이다.

 푸틴의 기자회견 발언에는 장기적 안목과 냉철한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는 게 대체적 평가다. 거침없이 할 말을 다 하는 듯했지만 서방과 우크라이나를 안심시킬 만한 단서들을 적절히 배치했다. 기자회견 후 “(서방은) 또 푸틴을 용서하게 됐다”는 분석(WSJ)이 나오는 이유다. 사태 초기부터 끌려다닌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시리아에 이어 또 한번 푸틴에게 말렸다는 진단도 있다.

 기자회견 중 푸틴은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동부가 무법천지가 되고 도움을 청하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시민들을 보호하는 게 정당하다”고 말했다. 전쟁 의지는 없지만, 문제가 생기면 개입하겠다는 뜻이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 방문에 맞춰 군사훈련을 중단함으로써 키예프 정치인들의 경계 수위를 낮췄다. 그러면서도 “원래 계획된 군사훈련 일정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크림반도 합병 계획이 없다”는 말은 바로 효력을 발휘했다. 푸틴은 “오로지 (크림반도) 주민만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언뜻 당연한 말 같지만 이는 곧 주민들이 독립을 결정할 경우 존중돼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사실 러시아는 이미 챙길 것은 다 챙겼다. 최근 사태로 크림반도의 친러시아 정서는 한층 짙어졌다. 자치권 확대를 위한 조치가 잇따르고 있어 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줄어들 가능성은 작다.

 세바스토폴에서 러시아 흑해함대 주둔을 연장하고, 주둔 병력 규모를 늘리는 것도 한층 손쉬워질 전망이다. 크림반도가 우크라이나 자치국 형태로 남아 있어야 본토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유리하다. 러시아가 괜한 위험을 감수하면서 전면전을 펼쳐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축출된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을 감싸는 듯한 발언 속엔 키예프 과도 정부를 향한 화해의 메시지를 담았다. 푸틴은 과도정부를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으로 폄하했다. 그러나 “야누코비치는 정치생명이 끝난 인물”로 평가했다. 선거를 통해 적법한 정부가 들어서면 이들과 대화할 것이라는 신호다.

 루슬란 푸호프 러시아 전략분석센터 소장은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 티모셴코 전 총리가 정권을 잡는 것이 푸틴의 마지막 한 수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조국당 소속 티모셴코는 최근 러시아에 대한 비난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정치인보다 푸틴과 돈독하다. 이미 대선 출마 의사를 밝힌 티모셴코는 앞서 “우크라이나의 이익을 위해 언제라도 푸틴과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티모셴코를 통해 우크라이나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 푸틴이 계획하는 ‘신의 한 수’가 될 수도 있다.

 ◆EU “우크라이나 110억 유로 지원”=유럽연합(EU)은 국가부도 위기에 빠진 우크라이나에 110억 유로(약 16조5000억원)를 지원하기로 했다. 조제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은 5일 차관 16억 유로는 이른 시일 내에, 무상 공여 14억 유로는 2년에 걸쳐 지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유럽투자은행(EIB) 등은 80억 유로를 대출해주기로 했다.

전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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