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新전쟁 문화코드] 1. "세상에 좋은 전쟁은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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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지난 1천5백년 동안 인간 역사의 3분의 2를 차지해 왔다고 프랑스의 문명 비평가 자크 아탈리는 적고 있다. 그 중에서도 20세기의 역사는 분명 전쟁의 역사라 할 만하다.

직접 전투에서 3천6백만명이 죽었으며 그와 관련돼 학살된 수는 1억1천9백만명이나 된다고 했다. 하지만 에릭 홉스봄의 '20세기의 역사'에는 1억8천7백만명으로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은 것으로 돼 있다.

*** 평화에 대한 기대 언제나 깨져

더욱 충격적인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다는 그 전후 기간에도 이 지구상에선 1백60개나 되는 많은 전쟁이 끝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왔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1945년에서 90년까지 총 2천3백40주 가운데 전쟁의 총성이 멈춘 날은 겨우 3주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전사자 수만 해도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맞먹는 7백20만명을 기록한다.

그러나 정말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통계 숫자가 아니다. 그렇게 많은 전쟁을 되풀이하고서도, 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당대의 전쟁 코드를 잘못 읽어왔다는 점이다.

20세기 초에 유럽 각국에서 자유무역의 기운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전쟁은 이제 끝났다고 한숨을 돌렸다. 1910년에 '거대한 환상'이라는 책을 쓴 영국의 작가 노먼 앤젤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전쟁에 대해 더 이상 흥미를 보이지 않은 유럽과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산업 활동이 군사 활동을 압도하게 됐으며 그런 세계에서는 더 이상 전쟁 본능이 평화 본능과 맞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2~3년도 안돼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만다.

그렇게 전쟁-평화의 코드를 잘못 읽는 실수는 1백년 전에도 있었고 1백년 후에도 일어났다. 18세기의 프랑스 철학자 몽테스키외는 국제 무역으로 모든 상인과 교역 국가들이 국경을 초월해 뭉칠 수 있게 됐으며 세계는 한층 더 평화로워졌다고 생각했다.

물건을 주고받는 두 나라의 관계는 서로의 필요성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비록 격한 감정이 생겨나도 폭력을 휘두르기보다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품행을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 더 이롭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련의 붕괴로 냉전이 종식돼 갈 무렵에도 많은 정치인.언론인, 그리고 학자들은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지배하는 민주주의의 세상에서는 더 이상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축배를 들었다.

이제 전쟁은 노예제도나 결투처럼 과거의 박물관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앤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한 말의 메아리는 쿠웨이트를 친 이라크의 악몽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낙관론자들의 평화론은 오히려 전쟁론자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구실을 했다. 냉전 때의 경우처럼 강국들의 억제력이 이라크 같은 호전적인 나라들의 고삐를 죄었더라면 전세계가 동원되는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라는 논리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재무장하고 나치가 등장해 그 세력이 유럽 전역으로 암처럼 번져갈 때에도 주변의 강국들은 평화 외교정책을 썼다. 그 결과로 유대인을 비롯해 무고한 시민 수백만명이 가스실에서 죽었으며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았다는 것이다.

냉전이라는 말 자체가 20세기에 만들어진 신어가 아니라 13세기 지중해 주변의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스페인에서 사용한 말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사람들도 있다.

냉전 위에 아무리 포스트라는 말을 붙인다 해도 그와 비슷한 상황은 평화라는 말 뒤에 잠복해 발톱을 세우고 이빨을 간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좋은 전쟁이란 없다. 그러나 분명히 나쁜 평화는 존재한다"라는 논리가 등장하게 된다.

*** 이라크戰서 달라진 전쟁 읽어야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전쟁과 평화에 대한 원론적인 토론이 아니라 9.11 테러 이후 새롭게 등장한 상황과 이라크 전쟁의 새 문명 문화 코드를 정확히 읽어내는 방법과 힘이다.

신장대 같은 격정적인 플래카드와 그 구호로는 21세기가 또다시 전쟁의 세기가 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 또다시 한반도에 깔릴지도 모를 전쟁의 구름을 밀어낼 수도 없을 것이다.

묵은 관념이 아니다. 가나다를 처음 배우는 아이들처럼 눈을 맑게 뜨고 21세기와 함께 우리에게 다가선 전쟁의 낯선 상형문자들을 읽어가야 할 것이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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