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과 인내…자유 찾은 안도|박명석 쌍룡호 선장 선상「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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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쌍룡호가 23일 부산 오륙도 앞 바다에 정박, 방역과 입항절차를 밟고있는 동안 본사 취재반은 단독으로 쌍룡호에 올라 하오 1시20분부터 약 50분 동안 선상취재와 함께 선장 박명석씨와 회견, 약 30분 동안 1문1답을 나누었다.
-무사히 귀환하게된 심정은 어떠한가.
『큰 홍역을 치른 것 같다. 끝까지 성원해준 정부·국민과 본사 김진기 사장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회사가 본 피해가 여간 크지 않아 선장으로서 도의적 책임을 느끼나 당시의 상황에선 인도주의에 입각한 해상구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서 난민을 구조하게됐으며 결과적으로 그들이 살아 남게되어 기쁘기 짝이 없다.』
-건강상태는 어떤가.
『나를 비롯한 28명의 선원들은 모두 건강하다.
난민들 가운데 다행히 군의관이 10명이나 있어서 건강 유지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가족들의 소식이 궁금하지 않은가.
『항상 집을 떠나 사는 선원이지만 이번만큼은 한시도 가족들의 안부가 걱정되지 않을 때가 없었다. 특히 아내는 지난번 인천출항직전에 개복수술을 받았는데 경과가 어떤지 궁금했다.』
-난민들을 구조할 때의 상황은.
『지난 2일 상오 5시쯤 월남의 최남단「카마우」남서30「마일」해상 약 1km앞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배를 발견, 미 해군함정인 줄 알고 접근했었다.
우리가 접근하자 10여명의 난민들이 바다로 뛰어들어 필사적으로 헤엄쳐오고 구조해달라고 간절히 호소했다. 그냥 두었다가는 모두「스크루」에 말려들어 죽을 것 같아 배를 정지시키고 「라이프·재킷」을 던져 모두 구조했다. 그 안에는 부녀자들도 있었다.』
-선상 반란의 기미가 보인 것은 어느 때인가.
『배가 10여일이나 방황을 하고 식수가 모자라 제한급수지시가 내려지자 난민들은 극한상황에 처하게된 인간들이 그러하듯이 조그만 일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일부 혈기가 있는 젊은이들 사이에는 살기마저 등등해졌다.
난민들이 가장 화를 낸 것은 「필리핀」·대만과 태국의 「사타히프」기지 등 가는 곳마다 기항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기대가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들을 어떻게 설득시켰는가.
『나는 우선 선원들에게 난민들과 필요 없는 접촉을 금하고 친절한 언동을 하도록 엄격히 지시했다.
그리고 한국정부가 피난민 귀항문제를 백방으로 강구중이며 최악의 경우 책임지고 한국으로 옮겨 보호할 테니 안심하라고 설득했다. 처음에는 태국 정부와의 약속 내용을 설명해서 난민들의 마음을 달랬으나 이것조차 어긋나 사태가 악화되었다. 자칫하면 선원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순간이었다. 이 때문에 태국 정부에 경찰승선까지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나는 침이 마르도록 설득을 계속하면서 창고에 보관되어있던 총기를 난민들 몰래 바다에 버리고 비장한 각오로 만일의 경우에 대비했었다.』
-식량은 어떻게 해결했나.
『「사타히프」기지에서 기항이 거절될 당시 선내 식량은 선원들이 2, 3일 먹을 수 있을 것을 제외하고는 바닥이 났으나 「방콕」교민들이 모아준 성금 5백 달러로 식료품을 사 보태고 그래도 모자라「방콕」대리점에서 식량과 음료수를 보충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식수는 계속 식사시간외에는 공급을 제한, 최대한으로 버텨왔다.』
-항해 중 가장 기뻤던 일은.
『정부가 부산으로 귀항하라는 지시를 내려주었을 때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이 지시를 전해들은 난민들이 어제까지의 살벌하던 태도와는 달리 「따이한·넘버·원」을 연발하며 함성을 지르고 기뻐서 눈물까지 흘리는 것을 보고 나는 물론 함께 고생했던 선원들의 눈에도 감격의 눈물이 글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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