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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5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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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피야, 이젠 그냥은 내놓지 않겠다

피야, 이젠 그냥은 빼앗기지 않겠다

-조태일

오늘 우리 국토는 안녕하신가, 남녘에서 올라오는 꽃소식을 따라 훨훨 어디든지 내 나라 땅을 밟을 수 있는 그런 즐거움이 우리에게 있는가, 태어날 때부터 내 땅이지 못했고 한 평생을 살면서 반토막 국토만 딛고 살아야했던, 그 마저도 바람 잘 날 없는 국토를 줄기차게 노래했던 이가 '국토'의 시인 조태일이다.

조태일은 1941년 전남 곡성,태안사의 대처승을 아버지로 칠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다. 깊은 산속이라 같은 또래의 동무도 없이 혼자서 산을 헤매며 멧돼지.사슴.노루.고라니 등과 어울려 놀았다.

이 어린 날이 그의 시에 생명을 불어넣는 물줄기가 되었다. 아침 저녁 아버지의 목탁 소리와 독경 소리를 들으며 자라서 마음 속에 불심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아버지라 불러보지 못했던 스님 아버지를 열 두살에 여읜다.

곡성에까지 불어닥친 여순사건의 고비를 넘기고 광주에 나와서 전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2년 경희대 국문과에 입학하면서 시 쓰기에 골몰한다. 대학 2학년 때인 64년 1월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아침선박'이 당선되면서 그의 시는 식칼처럼 날을 세운다.

"벼랑을 건너 뛰는 이 무적의 칼빛은/ 나와 너희들의 가슴과 정신을/ 단 한 번에 꿰뚫어 한 줄로 꿰서 쓰러뜨렸다가/ 다시 일으키고 쓰러뜨리고 다시 일으키고"

70년 두번째 시집 '식칼론'은 이렇게 사뭇 시퍼랬다. 시 '국토'를 처음 발표한 것은 71년 '월간중앙' 4월호였고 75년 연작으로 쓴 시집 '국토'를 내면서 그의 시는 삶의 뿌리를 박고 사는 내 국토의 역사와 현실을 꿰뚫어 보며 시대정신을 갈아낸다.

"눈보라가 치는 날 술이 없으면 어찌 하나/ 눈보라가 치는 날 국경선이 안 떠오르면 어찌하나"

'국토 21'에서 이렇게 노래했듯이 조태일은 술을 좋아했다. 나와는 신춘문예 당선되던 해 맞닥뜨려 내가 신촌에서 셋방살이 할 때 하루가 멀다하고 휘경동에서 신촌까지 드나들었고 그가 세검정 김관식의 집에 살 때는 홍은동까지 오가며 집에 담가놓은 과일주 한 항아리를 나도 없는 사이에 다 비울 정도였다.

남일인쇄에서 일하던 69년에는 월간 '시인'을 창간해 70년 11월호까지 통권 17권을 혼자 손으로 꾸며낸다. 김지하.양성우.김준태 등의 신인 발굴도 '시인'이 해낸 자랑거리였다. 이탄과 나는 편집위원으로 이름이 끼여 있었지만 그저 들러리였을 뿐이다.

황소처럼 우직하고 뚝심이 센 그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도 늘 앞장서서 80년에는 계엄법 위반으로 다섯달 징역살이도 한다. 하던 인쇄업도 팽개치고 광주대학 교수가 되고 예술대 학장까지 하더니 99년 9월 7일 술 때문에 생긴 간암으로 갇힌 국토를 떠나 더 넓은 국토로 간다.

스물여덟살에 시 '간추린 일기'에 "내가 죽는 날은 99년 9월 9일 이전"이라고 박아놓았으니 죽는 해와 달과 날에서 이틀 앞당기는 그 혜안은 태안사의 목탁소리에서 깨친 것인가.

"보성강 태안교를 지나며/ 어머니,오오냐 오오냐/ 내 탯자리를 지나며/어머니! 오오냐 오오냐 오오냐, 오오냐"

어머니 세상 뜨신 뒤에도 그 통장에 다섯 해나 용돈 송금했다는 그는 지금 어디 쯤에서 오오냐를 듣고 있을까.

이근배 <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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