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암흑 속의 23년 참회의 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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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아파트」는 방 3개에 부엌·목욕탕 겸 세면장·화장실이 달린 구조였다.
3개의 방중 온돌방은 밥을 해주는 60세쯤 된 평안도사투리의 가정부(실은 감시역) 차지였고 내가 거처할 두 방은 「페치카」처럼 가운데 쇠판으로 된 벽난로가 시설돼 있었다.
하나는 침실이고 다른 하나는 이른바 밀봉교육을 받는 학습실이었다.
입소즉시 나보다 한두살 위인 그 지도원(성은 노)은 『오늘부터 김 동무는 김 선생이 되는 것이오』하고 호칭부터 바꾸어주고 평안도 댁 가정부와 인사를 시켜 주었다. 나의 밀봉교육 생활은 이로써 시작됐다.
교육 첫날인 이튿날은 노 지도원과 함께 나를 지도하게 된다는 35세쯤 된 이모 지도원과 역시 이름과 소속을 밝히지 않는 내 또래의 부장과 부국장으로부터 격려와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다.
『이제부터 일정한 학습을 하게되니 몸조심하고 내부생활을 잘 조직, 당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활동하라』는 것과 『가족들의 생활은 현 수준(수입심사소 부소장)에서 보장하겠으니 걱정 말라』는 등의 얘기였다. 이날은 그들과 저녁까지 장기를 같이 두는 등 가벼운 시간으로 끝나고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학습이 시작됐다.
첫 「코스」는 사상교육이었다. 매일 상오7시에 기상, 조반을 한 다음 8시부터 학습을 시작, 점심시간(하오1시∼3시)과 저녁시간(6시∼8시)을 빼고 하오9시∼10시까지 계속했다.
교육과정은 담임 격인 이·노 두 지도원이 정해주는 김일성의 교시·회상기와 당 정책 등의 서적·관계자료를 침실 옆방인 학습실에 들어가 읽고 독후감을 토의하는 것이었다. 모두 평소에 읽고 들은 것에 불과해 새삼 교육을 받는다기보다는 마지막으로 사상을 다져두는 「코스」같았다. 그러나 매사에 당성을 제일로 치는 북의 체제여서 「스케줄」은 빈틈이 없었으며 1∼2주마다 한번씩 영화·연극구경이나 산책을 나가 바람을 쐬기는 했으나 꼬박 3개월을 방안에 갇혀 이 사상교육을 받아야했다.
교육이 시작되면서 식사조건 등 대우는 일반생활에 비해 좋은 편이었다. 쌀밥에 쇠고기·돼지고기가 계속 공급되고 반찬도 서너 가지 더나왔다.
강냉이밥에 대면 성찬이나 마찬가지.
55㎏이던 체중이 사상교육이 끝나던 이듬해(69년) 2월초에 가선 65㎏로 무려 10㎏나 불어나기까지 했다.
이 무렵부터 서울방송(KBS)도 듣게 했다. 남한의 어투와 사정을 익히게 하기 위한 고려였다.
그때 들은 것 중 기억에 남는 것은 김세레나가 나온 어느 공개방송으로 사회자가 『민요가수인 세레나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왔다』고 우스개를 던지는 대목이었다. 그 때까지 그런 「스커트」를 본적이 없는 나는 「미니」란 말과 「스커트」란 말을 궤 맞추어보다가 다리가 훤히 노출되는 치마. 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듣고 무슨 발견이라도 한듯 혼자서 좋아 킬킬거린 일이 있다.
이어 본격적인 간첩교육이 시작됐으며 맨 먼저 통신기초교육에 들어갔다. 생전 처음으로 「모르스」부호를 치는 법과 받는 법을 배워 나갔다. 이 역시 종일 방안에 들어앉아 전문요원의 지도로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다소숙달이 된 뒤에는 「테이프·리코더」를 걸어놓고 연습, 실력을 재보기도 했으며 그 다음에는 매일 하오3시부터 시작되는 무선국의 전파를 받아 보는 등 「테스트」를 당했다. <계속> 【김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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