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그 입지의 현장을 가다|「브라질」의 천공기(드릴) 제작자 이봉렵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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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작년 한햇 동안 6백만「달러」 어치를 생산한 이씨의 사무실에 들어서면 처음에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틀림없이 대회사의 사장인데 전혀 사장실 같지 않다. 사장실을 따로 가져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자재 구입과 판매 업무를 맡고 있는 대학 출신의 사무 직원과 대학도 못 나온 사장이 머리를 맞대고 있으며 그의 책상 위와 서랍 속에는 각종 「샘플」과 전문 서적이 쌓여 있다. 마주 보이는 벽에는 「인내」 「극기」라는 붓글씨가 붙어 그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

<각종 설계도를 보물처럼 간수>
『나는 말입니다. 「엔지니어」지 회전 의자나 돌리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이씨는 외국 빚을 얻어다가 본사 건물을 거창하게 지어 응접실이 달린 사장실을 따로 차려「카피트」위에서 여비서의 시중을 받는 서울의 어느 「사장님」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이씨가 뭣보다도 보물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수천 장의 설계도와 『윙윙』거리는 현장. 설계도가 보관된 방에는 함부로 들어 갈 수 없으며 평소에는 큼직한 자물통이 걸려 있다. 영국의 「하이턴」 공작 기계 공장에 지난 72년 제1호기로 발주한 「웰딩·머쉰」도 이씨가 자랑하는 것. 2년의 공정을 거쳐 74년 5월에 도입한 이 기계는 압력식 용접기로 싯가 1백만 「달러」.
「텅스턴」이나 「코발트」강과 보통의 강철 환봉을 각각 고속으로 회전시키면서 유압을 이용, 40t의 압력을 가하면 맞닿는 부분만 열에 녹아 용접된다.
「수아비스」 공장의 공작 기계는 모두 서독·영국·「스위스」·미국 등지에서 수입한 특수 선반 「밀링」 「셰이퍼」 등이며 일제 공작 기계는 지금은 「기념품」이 된 1대밖에 없다. 이씨는 『특수 공구 분야에서는 내가 앞섰다. 일제 기계는 약해서 쓰지 않는다』고 했다.
1대뿐인 소형 일제 선반은 이씨의 오늘을 열어 준 증인 같은 존재. 워낙 고물이고 구식이어서 고철 값밖에 안되지만 공장 구석에 놓아두고 마음이 울적하거나 어려움에 부닥치면 그 앞에 서서 감회와 결심을 다짐하곤 한다는 것.
그도 그럴 것이 이 선반 1대로 이씨는 「상우파울루」 변두리 2평 짜리 셋방에서 「수아비스」에 공구 공장을 차렸던 것. 60년 5월 23일 이씨는 겨우 22세짜리 선반공으로 현재의 동업자인 독일계 이민3세 「군트겐」씨(50)를 만나 자립의 터전을 닦았다. 18세 소년이 혈혈단신으로 「브라질」에 온지 4년만의 일이었다.
놀랍게도 이씨는 인민군 소년병 출신. 중립국을 택한 포로 88명 가운데 자신의 의지를 집요하게 닦아 정상을 차지했다. 영락없이 6·25의 비극이 낳은 희생자였으나 스스로 삶을 열어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살아온 것은 배달겨레의 슬기와 끈기 때문이리라.
이씨의 고향은 함남 단천군 광천면 운천리. 4남 4녀의 형제 가운데 7번째로 어릴 때는 개구장이. 해방되던 해 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인 아이들과 쌈질이나 하는 것이 재미였다는 것. 그때 일본인 교장의 아들 「모리다」와는 앙숙이었는데 지난 70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 역시 공구 공장의 공장장이 된 그를 만나 회포를 풀었다. 넉넉한 집안의 막내아들이었던 이씨는 아무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으나 6·25사변은 그에게 엄청난 변화를 주었다.

<인도 생활 2년만에 브라질로>
북한에 공산당이 정권을 수립하여 인민 학교에서부터 공산주의 교육을 시켜 그는 다만 앵무새가 되어 「김일성 수령」을 외었다. 소년 단원이었던 그는 한때 『이승만을 타도하자』고 부르짖었지만 정치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어린애였다. 그가 광천고중 2학년이었을 때 전세가 역전되어 괴뢰군이 밀리자 고중학생들까지 소년병으로 끌려갔다. 53년 5월 15일 인민군 제32사단의 말단 소총수로 제 키보다도 긴 구구식 장총을 메고 양구 전선에 배치됐다. 그때 그는 겨우 만 15세의 소년. 전쟁이 뭔지도 몰랐고 방아쇠 당기는 법도 끌려가면서 배웠을 뿐인 「전사」였다.
겨우 2개월이 지났을까 했을 때 휴전을 앞두고 더욱 치열하게 벌어진 교전에서 그는 오른쪽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고 정신을 잃었다. 그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 논산 훈련소의 후송 병원 「베드」위에 누워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1만2천여 명의 사단 병력이 궤멸하고 겨우 11명만이 목숨이 붙어 포로가 되었던 것. 한달 동안의 치료로 상처가 아물자 또 정치극의 무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정전 협정 규정은 포로의 자유의사에 따른 송환 문제를 포함하고 있었다. 하루는 인민군의 선전을 들어야 했고 다음날은 국군의 호소를 들었다. 죽어도 북으로는 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그는 중립국행을 자원했다. 15세 소년으로서는 감당키 어려웠던 전쟁 경험이 차라리 새로운 모험을 유혹했던 것. 『부모 형제의 생사를 몰랐고 이미 죽은 것으로 치고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했죠』-.

<축구 공으로 향수 달래기도>
54년 2월 아직 잔설이 흩어지지도 않은 추운 날 인천 부두를 떠난 영국 수송선에는 인도로 가기를 원했던 포로 88명이 타고 있었다. 부두에서는 『당신들이 조국을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고 안타깝게 말렸지만 포로들은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멀어져 가는 고국 땅을 바라볼 뿐이었다.
19일간의 항해 끝에 인도의 「마다라스」항에 도착하여 「뉴델리」의 65적십자 부대 막사로 들어갔다. 이국 풍물이 신기하기도 했고 전쟁이 없는 나라라고 생각할 때 잘 왔구나도 싶었지만 뒤이어 밀려온 향수는 어쩔 수 없었다. 이씨는 이를 잊기 위해 축구를 배웠다. 체력 단련이나 「레크리에이션」을 위해서 보다는 고독을 잊기 위해, 향수를 쫓아 버리기 위해 공을 찼다. 무엇에라도 몰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들에 대한 인도 정부의 대우는 비교적 좋은 것이어서 침식 제공에 한 달에 10「달러」정도의 용돈도 주었다. 이씨는 이때 틈틈이 영어를 배워 제법 제 의사를 나타낼 수 있었다. 거의 무위도식하는 생활이 2년이나 계속되었다. 더러는 인도 안에서 직장을 구하기도 했으나 이씨는 보다 넓은 「브라질」로 가기를 원했다. 이씨 등 56명은 「브라질」 정부의 허가를 받아 56년 2월 6일 군용 비행기편으로 「리오데자네이로」에 도착했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달콤한 꿈이 아니었다. 「브라질」 정부는 이들에게 영주권과 노동 수첩을 내주면서 『선택의 자유는 당신들이 가졌다. 영 살길이 없으면 언제든지 이민 수용소로 돌아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상우파울루=김재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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