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출현한 무장 간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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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인지 사태의 비극적인 종말과 이에 고무된 김일성의 북경 방문과 남한 혁명 지원 호언 등으로 북괴의 군사적 도발 위험감이 여느 때 없이 높아지고 있는 이때 다른 곳도 아닌 한반도의 최남단 부산에서 무장 간첩이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대간첩 대책 본부의 발표에 의하면 지난달 29일, 부산시 동래구 석대동 뒷산의 「아지트」에 숨어 있던 무장 간첩을 주민의 신고에 따라 군·경 및 예비군 합동 수사 작전으로 1명을 생포하고 1명은 추적 중이라는 것이다.
북괴 무장 간첩 남파는 1948년 11월 14일 양양서 오대산 지구를 거쳐 정선 부근까지 남하한 제1차 침투 공작 후 끊임없이 계속돼 왔기에 새삼스러운 것도 놀랄 것도 아니나, 이번 경우는 그 출몰 장소가 이 나라 제2의 대도시 부산이라는 점 말고서도 다음 두 가지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하겠다.
그 첫째는 해방 30년이자 노동당 창당 30년이 되는 올해를 그들은 「혁명적 대사변」의 시기로 잡고 있다는데 이런 때에 무장 간첩을 이 나라의 최남단까지 침투시키는 모험을 저질렀다는 점이고, 둘째는 이로써 녹음기를 틈타 더 많은 간첩을 침투시킬 가능성이 농후해졌다는 점이다.
김일성은 해방 후 「혁명기지 노선」을 채택한 후 일관하여 소위 「남조선 해방 전략」을 광적으로 추구해 왔는데 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북괴가 대남 폭력 혁명 수행과 그들의 소위 결정적 시기에 대비하는 지하당 조직망 결성을 위해 특수 유격대를 편성, 맹훈련 중에 있음도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창설 초기인 1967년께는 이 유격대는 「대남 사업 총국」 지휘 감독하에 민족 보위성 정찰국에 직속돼 있었으나,1970년 제5차 당대회를 전후하여 대남 공작 기구 전체가 개편됐다.
북괴 군사 관계 자료에 따르면 노동당 중앙위 대남 담당 비서 산하 연락부에 지하당 공작을 전담하는 약5백∼6백명이 있고, 인민 무력부(민족 보위성의 개칭) 정찰국 소속 특수 8군단에 약1만5천명, 전방 3개 집단군 예하 6개 경보병 여단에 약 2만명이 있다는 것이다.
북괴는 지금까지 「게릴라」의 근거지 확보·지하당 공작·군사 기밀 탐지·사회 불안 조성 등을 위해 여러 차례 무장 간첩을 남파했으나 모조리 실패했으며,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남 공작 총책이 여러번 숙청 당하기도 했다.
대남 침투 공작이 이처럼 벽에 부딪쳤으므로 1965년, 모택동에 의해 적극적인 대남 「게릴라」전 전개를 강요당했을 때 북괴는 난색을 표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완곡하게 거부했었다는 것이다.
첫째 남한은 교통이 비교적 발달돼 있고, 둘째 해안선이 길고 오지가 별로 없기 때문에 「게릴라」 토벌군의 출동이 용이·신속하고, 세째 남한은 나산이 많아 지형 지세가 「게릴라」 활동에 불리하고 따라서 쉽게 발각되고 만다는 것이었다.
이때의 의견 대립이 북경·평양간의 불화를 초래했고 북괴의 「자주 노선」 선언의 배경을 이룬 것이었으나 전 한반도의 적화 통일 전략에의 망집에 사로잡힌 김일성으로서는 끝내 무장 간첩의 남파 계획을 단념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도 알 만하다.
그러나 북괴 무장 간첩 침투 기도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성공하지 못한 으뜸 가는 이유는 남한에는 무장 간첩이 발붙일 토양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번 생포된 무장 간첩의 경우가 다시 한번 입증하고 있듯이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뭉쳐 있는 남한 국민이 있는 한 물고기(게릴라)가 놀물(민중)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방심은 금물이다. 3천만 우리 국민은 더욱 경각심을 높여 숨기 쉽고 노숙하기에 편리한 녹음기를 틈타 대량 남파될지도 모르는 무장 간첩의 침투·준동을 철저히 봉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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