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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말레이시아 국왕주치의 최정선 여사(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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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쿠알라룸푸르=전 육 특파원】울창한 수풀과 상하의 푸르름이 정돈된 도로와「앙상볼」을 이루어 초행자의 기분을 한결 산뜻하게 하는「쿠알라룸푸르」시내의「제너럴·호스피틀」이비인후과 진찰실-. 흰 가운과 청진기를 단정하게 갖춘 여의사의 모습이 유난히 인상적이다.
나이를 캐묻지 않는다면 갓 의과대학을 졸업한 노처녀처럼 보인다. 그 만큼 일하는 태도가 활기차고 싱싱하다. 몸에 밴 친절과 자상함이 조금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게 한다.
얼핏 보아도 이 여의사의 비중이나 위치쯤은 당장 짐작이 간다. 여기 저기서 바쁘게 불러 대는「닥터·초이」-.

<인색한 이민법 속 극진한 대우>
이민에 대해 인색하기로 이름난「말레이시아」정부로부터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국립종합병원의 과장 직(공무원)을 맡아 10년 동안 봉직하고 있는 최정선 여사(45)를 두고 하는 말이다. 최 여사는 단순히 외국인의사라기보다는「나시루딘」전「말레이시아」국왕의 주치의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다.
『남편과 자식이 있는 여자의 몸으로 선뜻 결심하기 어려운 일을 시작해 놓고 보니 고민도 많았어요. 우여곡절도 많았고요. 이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 오히려 이것이 고국 같은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한말에서 일제시대로 이어지는 조국의 기구한 운명과 함께 혈혈단신으로 흘러 들어와 갖은 고생 끝에 가까스로 자리잡은 우리교포들을 만나기가 십상인 동남아에서 최 여사를 만나는 사람은 우선 색다른 느낌을 갖는다.
그것은「말레이시아」라는 나라가 불과 10년 전(65년)에 독립한 신생국이라는 점과 그렇기 때문에 모든 분야에 외국인의 기여 가 다른 어떤 나라에서보다 돋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 여사가 이 나라에 온 것은 독립직후인 65년 12월이었다. 「말레이시아」정부의 초청을 받고 2년 계약으로 40명의 한국인의사들이 을 때 그 일원으로 왔다. 외국생활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과 외국에서 활동중인 친구들의 권유가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때는 동료의사들이 모두 귀국하거나 제3국으로 흩어진 후에도 유독 그녀만은 10년 세월을「말레이시아」에서 보내고 있는 것은 왕실의 주치의라는 특수관계 때문이다.
많은 한국의사들이「말레이시아」에 좀더 있기를 원했지만 이 나라의 이민법이 계속체류를 허용하지 않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말라야」인·중국인·인도인들이 각기 이해관계를 달리하며 불안한 출발 한「말레이시아」는 짧은 역사 탓으로 사회 각분야에 걸쳐 외국인들로부터 인력 면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외국인들에게 좀 체로 영주권을 주지는 않는다. 이들이 한국 의사들을 초빙한 것도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였다.

<여성엔 불리한 계약조건 감수>
한국의사들은 비교적 좋은 조건으로 온 셈이었다. 월 봉급 1천2백∼1천5백 달러선의 계약관계였다. 그러나 최 여사 만은 예외의 불리한 조건으로 봤다. 여자라는 것 때문이었다. 회교국가인「말레이시아」는 여성취업자들에게는 가족수당을 인정치 않고 세금도 훨씬 무겁게 부과한다. 남자인 경우에는 가족일체에 대해 수당과 여비까지「말」정부로부터 지급 받았으나 최 여사는 고작 본인의 여비만 받은 채 외동딸 은주(당시6세)양을 데리고 왔다.
자리잡고 난 다음 남편 오세훈씨(47)를 초청하기로 하고 온 최 여사의 첫 임지는「쿠알라룸푸르」에서 52「마일」떨어진 시골의「디스트리트·호스피틀」이었다. 독립의 여세를 몰아 새로 지은 이 병원은 한국 같으면 의사 50명은 있어야 정상운영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였다.
독립 후 영국인의사들이 대거 떠났기 때문에 의사의 절대수가 부족했던「말」정부는 한국인의사 1명씩에게 모두 이 같은 규모의 병원을 통째로 맡길 수밖에 없었다. 오랜 영국의 식민동치를 받아 국민들이 비교적 질서감각이 있는 나라라고는 하지만 환자를 들보는 외국의사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벅차기만 한 일이어서 최 여사는 도착1주일만에 자신이 몸져눕고 말았다.
전공과목이 아닌 내과·산부인과·외과환자들이 밀어닥치자 견디다 못한 최 여사는 보건당국을 찾아가『당신 네 국민들을 다 죽이고 싶거든 이대로 계속하라』고 따졌다. 게다가 말이 통하지 않아 환자의 진찰에 착오가 나자 현지 중국계신문들은 연일『「말라야」말을 못하는 기독교의 나라에서 의사들을 데려다 우리를 죽이려 하는가』라는 기사를 실어 여론을 들끓게 했다.

<오진사례 국회서 말썽 빚기도>
견디다 못한 최 여사가 사의를 표명하자「탄수니」보건차관이「뉴·스트레이트·타임스」지에 『어떻게 외국인이 1주일만에「말라야」말을 할 수 있겠느냐』는 글을 써 의기소침한 최 여사를 위로하고 배타적 여론의 진정을 호소했다. 이어 보건차관은 최 여사에게 전공과목 외의 환자는『죽어도 당신 책임이 아니니 염려 말라』고 말하며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이 같은 말에 옹기를 얻은 최 여사는 선교사의 입장에서 난관을 하나하나 극복하기로 마음먹고 우선『스피크·말레이시언』이란 책을 사서 간단한「말라야」말을 익혔다. 최 여사 뿐이 아니라 같이 온 한국의사들은 모두 똑같은 곤욕을 치렀다.
외국의사의 초빙을 못마땅히 생각한 국회의원들이 보건장관을 국회에 불러 외국의사들의 오진사례를 따지는 날이면 최 여사의 가슴은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고 한다.
이러기를 9개월. 최 여사의「말라야」어 실력이 급속히 늘어나고 지방민들과의 사이가 좋아졌을 무렵 보건당국은 최 여사를「쿠알라룸푸르」에 있는 이 나라 제일의 종합병원인 「제너럴·호스피틀」이비인후과로 옮겨 주었다.
이곳에서 현재는「트릴가노」주 왕이지만 당시 국왕이었던「나시루딘」의 주치의로 발탁되면서부터 최 여사의 생활은 보람을 더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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