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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속으로] 정치인 아내 5인의 내조 열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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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정치인의 아내는 체스판의 최고 병기 ‘퀸(Queen)’을 닮았다.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상하좌우, 대각선으로 종횡무진하며 게임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선거철엔 이들의 영향력이 민심의 바닥에 스며든다. 평소엔 이름조차 낯설지만 어느새 정치인의 이미지를 좌우하고, 표심을 바꿔놓는 그들은 ‘정치인의 아내’가 아니라 ‘정치인’이라 불릴 만하다. 사진 순서는 의원 선수(選數)·나이·정당순

‘정치인의 아내’만큼 독특한 존재감을 가진 사람도 드물다. 너무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적(敵)보다 냉정한 일침으로, 그러나 어머니 같은 이해심과 희생으로 남편의 길을 돕는다. 흥선대원군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던가. 하지만 이제 암탉이든 수탉이든 함께 목청을 뽑지 않으면 아침이 오지 않는 시대가 됐다. 정치권에 소문난 내조의 달인 5명. 한국 현역 최다선(7선)이자 박근혜계 맏형으로 돌아온 서청원 의원의 전략참모 이선화(70) 여사, 경력이든 재산이든 남부러울 것 없지만 서울시장에 배팅한 정몽준 의원의 이미지 메이커 김영명(58) 여사, 세 번의 대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인제 의원을 일으켜 세운 김은숙(66) 여사, 드라마 속 명성황후, 현실에선 김한길 민주당 대표의 숨은 조력자 최명길(52) 여사, 고 김근태 상임고문을 가슴에 품고 정치인으로 변신한 민주당 인재근(61) 의원이 그 주인공이다.

지역구 관리, 주민 경조사도 챙겨
“남편 대신 출마해라” 얘기 많이 들어
1998년 박근혜 보궐선거 지원도

박근혜계의 좌장인 서청원 의원은 서울 상도동의 서민아파트에 29년째 살고 있다. 주민들 사이에선 ‘문 열려 있는 집’으로 통한다.

 “우리 집은 누가 와도 문전박대를 안 하니까 누구든 와서 차 마시고 과일 먹고 가는 거지. 아무나 맞이할 수 있는 거, 그게 우리 같은 사람들 특권 아니에요?”

 부인 이선화 여사의 말이다. 정치 경력 33년째인 서 의원에게 이 여사는 내조자 그 이상이다. 사실상의 ‘전략기획참모’다. 두 사람은 대학 1학년 때 미팅으로 만났다. 이 여사가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학생회장, 서 의원은 중앙대 정치학과 학생회장을 하며 더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정치 얘기를 하다 연인 사이로 발전했고 1969년 결혼했다. 이 여사는 동등한 파트너였다. 서 의원은 “기자(조선일보 사회부) 시절 집사람이 기사 아이디어를 줘서 특종을 여러 번 했다”고 기억했다. 서 의원이 국회에 입성한 뒤엔 지역구 관리를 도맡아했다. “남편 대신 출마해 보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친박연대 창당 과정의 공천 차입금이 문제가 돼 정치를 접었던 서 의원이 지난해 경기도 화성 보궐선거에 나선 데는 이 여사의 힘이 컸다. 이 여사는 “자식한테 물려줄 재물도 없는데 당신 명예 회복이라도 해야 될 것 아니냐. 기회가 주어졌으니 또 한 번 감사하면서 정말 조심스럽게 하면 된다”고 격려했다고 한다.

서 의원은 서울 동작에서만 5선(11·13~16대)을 했다. 여기엔 이 여사가 조직한 동작 여성아카데미의 힘이 컸다. 지역구 여성봉사모임인 ‘청우회’에서 시작된 아카데미는 장학사업과 어머니합창단 활동 등으로 확대되면서 든든한 원군이 됐다. 선거철이면 매일 100명의 주민을 만나고, 공식 일정이 끝나고 주민들의 경조사를 챙기는 것도 이 여사의 몫이었다.

 서 의원이 사무총장이던 98년 4월, 4곳에서 보궐선거가 치러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배지를 단 대구 달성도 그 중 하나였다. 이 여사는 자진해 선거 지원에 나섰다.

 “새벽 4시에 집을 나서서 대구 달성, 경북 의성(정창화 전 의원)까지 다 돌고 집에 오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죠. 잠은 차 속에서 잤고… 그러다 보니 많은 의원 사모님들과 친분이 두터워졌죠.”

 “내조는 반대 감각을 갖는 것”이란 게 그의 지론이다. “남편이 여당이면 아내가 야당 입장에서 견제를 해야 가정도 유지되고 국가도 유지된다”며 “요즘도 시중 민심을 듣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은 남대문·동대문시장에 나간다”고 한다.

하루도 안 거르고 새벽기도
공천 마찰로 총선 불출마 고민 때
“그건 정공법 아니다” 말리기도

새누리당 정몽준 의원이 2일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후보 단일화(2002년)에 이은 또 한번의 큰 결단이다. 시장 출마를 정 의원은 누구와 상의했을까. 부인 김영명 여사는 “아빠(정 의원)가 고민하는 동안 지역 주민들 말씀 듣고 가족에게도 의견을 물었지만 결단은 본인이 내려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며 “사실 가족에겐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저도, 아이들도 아빠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인들은 “김 여사가 기도를 하면서 누구보다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 여사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기도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김 여사가 30대 초반이던 1988년 처음 치른 선거(울산 동구)의 기억은 ‘전쟁터’다. “울산은 쉬운 지역이라고 하지만 88년은 현대차 노사분규 이듬해여서 어려운 선거였다”며 “대놓고 돌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울산에서 내리 5선을 한 정 의원은 18대 총선때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 동작을로 옮겨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정동영 전 의원과 맞붙었다. 이명박 정부 임기 말에 치러진 19대 총선에서 야당 바람 속에도 살아남았다. 그런데 2년도 안 돼 정 의원은 서울시장 출마라는 모험을 택했다. 하지만 김 여사는 덤덤했다. “사실 4년에 한 번씩 선거 치른다는 것도 쉽지 않거든요. 남편이 출마 여부를 고민하는 동안 저도 마음의 준비를 했어요.”

 김 여사의 내조 스타일은 ‘만능 코디네이터’ 형이다.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멋 부릴 줄 모르는’ 남편을 위해 넥타이 색을 골라주고 옷 쇼핑도 대신한다. 피곤해하는 남편을 위해 종종 안마 서비스를 한다. 김 여사는 김동조 전 외무부 장관의 2남4녀 중 막내딸로 태어나 일본·미국 등에서 16년간 해외생활을 했다. 능통한 외국어 실력으로 시아버지인 고 정주영 회장이 88올림픽 유치활동을 벌일 때, 정 의원이 2002년 월드컵 대회를 유치할 때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했다.

 김 여사의 ‘정치 내조’는 올해로 27년째다. 주변에선 “드러내놓고 정치 관련 발언을 하진 않지만 꼭 필요할 땐 정곡을 찌르는 조언을 하는 편”이란 평가가 나온다. 지난 총선 때 공천을 두고 말들이 많아 정 의원이 불출마를 고민하자 “그건 정공법이 아니다”며 말린 일화가 유명하다.

 “저는 바쁜 남편한테 ‘또 하나의 귀’인 거죠.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서 비판·격려를 가감없이 전해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남편이 정치하는 걸 반대하겠느냐는 질문에 김 여사는 “솔직히 (정치인 아내의 삶을) 누구한테 권할 수는 없을 것 같지만 반대는 안 할 거예요 ”라고 했다.

‘경기도 힐러리’라 불릴 만큼 외향적
늘 정장 차림, 화사한 화장 화제
수십 년째 된장국 아침상 ‘밥상 내조’

새누리당 이인제 의원과 부인 김은숙 여사가 만난 지 올해로 꼭 50년이다. 두 사람은 중학교 3학년 15세 동갑내기로 만나 함께 꿈을 일궈 왔다.

 이 의원에게 김 여사는 ‘기댈 사람’이다. 대권 도전 세 번. 지지율 1위를 달리던 때도 있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하지만 이 의원은 2012년 새누리당으로 돌아와 당 대표직에 도전하고 있다. ‘피닉제(불사조를 뜻하는 피닉스+이인제)’라는 별명이 따라다니는 이유다.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오뚝이처럼 기사회생한 비결을 “김 여사의 내조 덕”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남편이 어려울 땐 무조건 격려해요. 그분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김 여사의 ‘치어걸 내조론’이다.

 김 여사는 이 의원이 경기지사 시절 ‘경기도 힐러리’라 불릴 만큼 외향적인 내조로 주목을 받았다. 1997년 대선 땐 화사한 옷차림과 화장으로 화제가 됐다. 겉만큼이나 속도 화끈했다. 2007년 대선 경선 때는 대책회의에 참석해 의견을 제시하고 새벽 1~2시까지 참모들을 챙겼다. 늘 활동적인 정장을 입고 현장을 누볐다. “우리 둘 다 충청도 출신이라 계보도 조직도 없었어요. 둘이 운동화 끈 조여매고 구석구석 다니는 수밖에 없었죠.”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는 오랜 청춘영화 같다. 중학교 3학년 때 학생모임에서 만났는데, 각각 경복고와 대전여고로 진학한 뒤에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제하다 이 의원이 입대하기 사흘 전 결혼식을 올렸다. 그래서 아직도 번듯한 결혼식 사진이 없다.

이 의원의 일기장과 얽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김 여사가 우연히 이 의원이 중학교 1학년 때 쓴 일기를 봤다. 거기엔 “우리나라는 왜 분단이 돼 있을까. 분단됐기 때문에 농촌이 가난하고 못 사는 것 같다. 어떻게든지 조국을 통일시켜서 우리나라를 부자 나라로 만들어봐야겠다”고 적혀 있었다. 김 여사는 “어렸을 때부터 뚜렷한 자기 주관이 있었던 게 지금의 그를 만든 것 같다”고 말했다.

 정치인 아내로 27년. 잇따른 대선 패배로 실의에 빠진 적도 있지만 1988년 광주 청문회 때의 활약상은 두고두고 자랑스러운 순간이다. 김 여사 는 수십 년째 된장국과 김치를 빼놓지 않은 아침상을 챙긴다. “남편은 농촌 출신이고 워낙 굶으며 살아서 돌과 나무 빼곤 다 잘 먹는다”고 했다.

 김 여사는 올 초 핵심 당원과 지지자들이 모인 신년하례회에 참석해 큰절을 해 화제를 모았다. 그는 “우리 캠프 분들은 시장통에서 오뎅국물과 돼지국밥, 쉰 밥까지 먹었다. 오랜만에 다시 뵈니까 정말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보선 때 낙선하자 “기죽지 말라”
‘명성황후’ 계약금으로 승용차 선물
황신혜 동원, 당 대표 당선 도와

설 연휴 마지막 날인 1월 29일. 민주당 주요 당직자들이 충북 청주의 제17전투비행단을 방문했을 때다.

 비행단장이 현황보고를 하려고 하자 김한길 대표와 동행한 부인 최명길 여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여기 앉는 건 아닌 것 같다”며 의자를 사양했다. “같이 오셨으니 괜찮다”며 권했지만 최 여사는 한사코 사양하다 “그럼 물러나서 앉겠다”며 의자를 뒤로 뺀 다음 자리에 앉았다.

 이미 너무나 잘 알려진 ‘스타’이기에 더욱 겸손하려고 스스로를 다지는 게 최 여사 스타일이다. 지방선거를 석 달 앞둔 최근엔 혹시라도 남편에게 피해가 될까 언론 인터뷰도 자제하고 있다. 최 여사는 헌신적 내조로 유명하다. 지난 설 연휴 4박5일 내내 버스로 이동하는 강행군 속에서도 피곤해하는 기색 없이 시민들의 손을 잡고 함께 사진을 찍으며 딸·며느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는 평가다. 동행했던 당직자들 사이에선 “난방이 잘 안 되는 숙소에선 반신욕을 하고 자면 따뜻하다고 넘겼고, 잘 못 먹는 홍어회를 상인이 입에 넣어주자 맛있게 먹었다”는 얘기가 확 퍼졌다.

 최 여사의 내조는 특히 선거 때 힘을 발휘한다. 지난 2001년 서울 구로을 보궐선거 때 둘째 아들을 출산한 지 보름 만에 퉁퉁 부은 모습으로 거리를 누비며 선거운동을 한 일화는 유명하다. 최 여사는 “요즘 발이 저린 게 그때 산후조리를 못 해서인 것 같다”고 농을 던졌다. 당시 김 대표가 낙선하자 최 여사는 “이 정도 일로 절대 기죽지 말라”며 드라마 ‘명성황후’ 주연을 맡아 받은 계약금으로 승용차를 선물하는 통 큰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013년에는 전당대회 장소에 동료 탤런트인 황신혜·김성령씨 등 연예인 부대를 동원해 김 대표 당선에 힘을 보탰다. 내조 비결을 묻는 질문에 최 여사는 “(내조에) 필살기는 없다. 무조건 도와달라고 한다” “정치적 조언을 하는 대신 ‘잠을 많이 자야 한다’ ‘식사를 제때 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며 말을 아꼈다.

 흥미로운 건 이런 내조 스타일이 김 대표에게 잘 맞는다는 점이다. 김 대표는 좀처럼 오르지 않는 민주당 지지율과 안철수 신당 등장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6월 지방선거를 치러야 하는 난제를 안고 있다. 힘든 시기인 만큼 최 여사는 요즘엔 억지로 뭔가를 하기보다는 남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쪽이다. 예를 들면 김 대표가 아침을 안 먹겠다면 굳이 권하지 않고, 좋아하는 담배나 햄버거를 찾아도 막지 않는 식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그 누구보다 열정적인 스타급 내조를 펼칠 것”이라고 주변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남편 고문당한 사실 전 세계 폭로
“고무신 거꾸로 신어도 좋소”
수배 시절 편지에 “웃기고 있네” 답장

필리핀에 코라손 아키노가 있다면, 한국엔 인재근이 있다. 평범한 주부였던 아키노는 야당 지도자였던 남편 베니그노 아키노가 총탄에 쓰러지자 정치가로 변신했다. 민주당 인재근 의원도 남편인 고(故)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의 뒤를 이어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평생을 민주화 운동에 바친 김 고문은 1983년 전두환 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다 85년 수감돼 갖은 고문을 당했다. 지난 2011년 겨울 세상을 떠난 것도 그 후유증이었으니 아내로선 목이 메인다.

 인 의원은 이듬해 19대 총선에서 남편이 3선을 지낸 서울 도봉갑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말 그대로 ‘남편의 이름으로’ 치른 선거였지만 “남편의 정신을 잇겠다”는 그의 외침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화여대 사회학과 출신인 인 의원은 민주화운동실천가족협의회·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에서 활약해 온 활동가였다. 김 고문도 생전에 아내를 “나의 비밀병기”라고 불렀다. 인 의원은 85년 남편이 당한 처참한 고문 사실을 전 세계에 폭로했고, 부부는 87년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받았다.

 경력만 보면 투사 이미지지만 인 의원은 매우 유연하고 낙천적인 사람이다. 세상은 살 만한 곳, 희망이 있는 곳이란 긍정의 힘이 넘친다. 김 고문이 민주화운동 시절 수배돼 집에 못 들어갈 때 “남편 노릇을 못하는 형편이니 고무신을 거꾸로 신어도 좋소”라고 편지를 보내자 인 의원은 “웃기고 있네”라고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

인 의원은 남편이 선거를 치를 때면 여느 부인들과 마찬가지로 발품을 팔았다. 2002년 선거 땐 남편의 생일이기도 한 밸런타인데이에 맞춰 ‘사랑의 초콜릿’이란 문구가 적힌 초콜릿 꾸러미를 들고 당사를 찾아 일일이 당직자에게 건네고, 선거 캠프 실무진을 위해 쇠고기 미역국 40인분도 거뜬히 끓여냈다.

인 의원은 김근태 정신을 민주주의와 인권, 즉 ‘인권정치’라고 압축한다. 아내로서, 정치인으로서 남편을 죽음으로 내몬 정권을 용서하기 어려운 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그는 앞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2011년 12월 30일 김 고문의 빈소에 이명박 전 대통령의 조화가 도착했을 때 장례위원회는 조화를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지만 인 의원은 꽃을 받아들였다. 그는 “대한민국 대통령직에 있는 사람이 보내온 것이니 받는 것이 좋겠다”고 했고, 꽃은 영정의 오른편에 놓였다. 정치인 인재근의 좌우명은 2012년 한 인권단체가 남편에게 수여한 상패에 적혀 있다. ‘인간의 삶은 폭력보다 강하다’.

이소아·김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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