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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달러는 준대요" … "받지 마, 약속보다 적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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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총 10억 달러(약 1조680억원)에 이르는 금고 돈을 은폐하려 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60·사진) 터키 총리의 통화 후폭풍이 거세다. 에르도안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통화 녹음 폭로 사흘째인 26일(현지시간) 수도 앙카라 등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잇따랐다. 이들은 “대도둑 에르도안은 사임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내각 총사퇴를 요구했다. 이스탄불 도심 탁심광장에선 제1야당인 공화인민당(CHP)이 주도한 규탄 집회에 수천 명이 참여했다.<본지 2월 27일자 2면>

다음 달 30일 열리는 지방선거에서 이스탄불시장 후보로 나선 무스타파 사르귤은 3000만 유로(약 438억원)짜리 가짜 돈다발을 나눠주며 총리의 부패를 비난했다. 유출된 통화 녹음 말미에 “조금 남은 3000만 유로를 어떻게 할지 고민이다”는 대목을 풍자한 것이다. 총리가 아들에게 “(돈을) 없애버려라”라고 말한 것에 빗대 “부패를 없애버리자”는 피켓도 등장했다. 경찰은 최루탄과 물대포를 쏘며 시위대를 진압했다.

 이 와중에 이날 두 번째 녹음 파일이 유튜브에 올라왔다. 2분 분량의 이 파일은 목소리나 말투가 1탄과 같아서 역시 에르도안과 아들 빌랄(33)의 대화로 추정된다. 다음은 통화 내용 전문.

 자=어제 싯키 씨가 왔는데, 사정이 있는지 이체를 못했대요. 한 10(1000만 달러, 약 107억원) 정도는 언제든 줄 수 있다고 하던데요.

 부=받지 마, 절대 받지 마.

 자=저 안 받을 거예요.

 부=받지 마. 그 자가 약속한 게 있는데, 그대로 가져와야지. 아니라면 필요 없어. 다른 사람들은 가져오는데, 말이 되나? 사업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니! 걱정 마. 결국은 우리 뜻대로 될 거야.

 자=네, 아버지.

 두 번째 파일의 통화 시점은 알려지지 않았다. 유튜브 영상에 곁들여진 터키어 자막은 대화에 언급된 싯키가 ‘튜랑 운송’ 회장 싯키 아얀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튜랑 운송은 이스탄불의 화물운송회사로 2010년 터키를 가로질러 이란 가스를 유럽까지 운송하는 1720㎞짜리 파이프라인 건설을 허가 받았다. 당시 115억 터키 리라(52억 달러) 규모 투자금에 대한 면세 혜택도 받아 특혜 논란이 일었다.

 에르도안 측은 강경 대응하고 있다. 이날 압둘라 굴 대통령은 논란이 돼온 사법부 통제 강화 법안에 서명했다. 사법부 최고 기관인 판검사최고위원회에 대한 행정부의 통제 권한을 강화하는 법안이다. 삼권 분립을 저해한다는 비판을 받은 이 법이 발효되면 1000명에 이르는 법조인이 면직된다. 이 자리는 법무부 지명 인력으로 채우게 된다. 굴은 인터넷 규제 법안도 곧 서명한다.

 정치 분석가들은 8월 대선의 전초전 성격인 지방 선거를 앞두고 페툴라 귤렌을 추종하는 야권 세력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한다. “다음 단계는 귤렌 세력의 교육·재정적 기반인 입시학원 폐쇄가 될 것”이라고도 본다. ‘히즈메트 운동’으로 알려진 귤렌 세력은 교육·의료·언론 등 광범위한 분야에 뻗어있다. 이번 스캔들 역시 지난해 12월 히즈메트 계열의 한 신문사가 고위 관료들의 뇌물과 비리를 폭로하면서 촉발됐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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