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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금고 돈 다 숨겨라" … 터키 뒤흔든 총리 부자 통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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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해 6월 이스탄불 탁심광장에서 촉발된 터키 반정부 시위가 레제프 에르도안 총리의 통화 스캔들로 인해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25일(현지시간) 수도 앙카라에 있는 중동공과대 학생들이 캠퍼스 내 신규 도로 건설에 반대하는 시위 도중 에르도안 총리의 얼굴이 그려진 현수막을 불태우고 있다. [앙카라 로이터=뉴스1]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60) 총리와 그 아들 사이의 통화 내용이 담긴 11분짜리 음성 파일이 터키 정국을 강타하고 있다. 24일(현지시간) 유튜브에 공개된 이 파일의 제목은 ‘대도둑 에르도안의 비리 녹음’이다. 에르도안과 아들 빌랄(33)로 추정되는 두 남자가 터키어로 대화하고 있다. 통화 시점은 지난해 12월 17일, 터키 검경이 장관 3명의 아들과 국책은행장 등 주요 인사를 뇌물 등 혐의로 체포한 날이다. 집권 정의개발당의 대형 뇌물수수로 비화된 이 사건은 두 달여가 지나도록 터키를 뒤흔들고 있다.

 “집이냐, 아들?” “예, 아버지”로 시작하는 통화에서 아버지는 “그들이 오늘 대비리 사건 수사를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어 “알리 아가오울(건설업계 거물), 에르도안 바이락타르(환경도시부 장관)의 아들, 제페르 차을라얀(경제부 장관)의 아들, 무암메르 귤레르(내무부 장관)의 아들 집에서 수사가 진행 중”이라고 전한다. 이어 부자는 숨겨둔 돈을 어떻게 빼돌릴지 상의한다.

 다음은 녹음 파일 속 통화내용을 우리말로 옮긴 것.

 부=지금 네 집에 있는 거 다 빼라.

 자=저한테 뭐가 있어요? 아버지 돈뿐이에요, 금고 안에.

 부=형이랑 얘기해라. 삼촌한테도 말해서 그것도 다 빼야 해. 매형에게도 말하고.

 자=돈을 어떻게 하라고요?

 부=지정 장소들로 보내.

 자=베라트(친척)한테도 있잖아요.

 부=나도 그 말을 한 거잖아! 빨리 만나. 삼촌 부르고.(중략)

 자=형이랑 다 모였어요. 베라트에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일부를 파루크 칼룐주(사업가)한테 주면 다른 돈처럼 처리할 수 있대요. 그러면 상당 부분 해결될 것 같은데요.

 부= 그래도 돼.

 자= 그리고 나머지 일부를 메흐멧 규르(건설무역그룹 회장)에게 주고, 계획이 생기면 이걸 쓰라고 할게요. 이렇게 하면 아주 줄어들고, 나머지를 옮길 수 있어요.

 부= 그러면 유리해. 모두 없애는 게 유리해.

 자=예, 다 없앨 게요.(중략)

 부=시킨 일 다 했니?

 자=일부는 했고 나머진 해진 뒤 할게요.

 부=양쪽 다 처리한 거야?

 자=줬어요. 둘 다 비웠대요.(중략)

 부=다 없앴어?

 자=아직 조금 남았어요. 3000만 유로 있는데 어떻게 할까 고민 중이에요.(중략)

 자=사만드라(지명)와 말테페(지명)에 있는 돈, 73만 달러와 30만 달러. 파익 으쉬크(사업가)한테 진 빚이 100만 리라(약 4억8000만원) 있어서 거기 줄게요. 남은 돈은 아카데미에 보내라 할게요.

 부= 그렇게 콕 집어 말하지마, 알았어? 사만드라든 어디든 가지고 있지마. 줄 거라면 빨리 보내줘. 왜 가지고 있어?

 자=알았어요, 아버지. 제 생각엔 우리가 실시간 감시받고 있어요. 사찰당하는 것 같아요.

 부= 그럴 수도 있어. 지금 우리가 이스탄불 경찰청에 뭘 좀 했는데….

 네 번에 걸쳐 이뤄진 통화에서는 10억 달러(약 1조원)에 이르는 현금을 어떻게 은폐할 건지 상의한다. 대화 말미 언급된 이스탄불 경찰청과 관련해서는 다음날 실제로 경찰청장이 경질됐다. 당시 에르도안 정부는 뚜렷한 이유 없이 경찰 고위직을 비롯해 주요 경찰 간부 46명을 교체했다. ‘대도둑 에르도안의 비리 녹음’ 파일은 공개된 지 이틀도 되지 않아 400만에 육박하는 조회수를 올렸다.

 정치권은 발칵 뒤집혔다. 줄기차게 총리 사퇴를 요구해온 야당은 공세 강도를 높였다. 제1야당인 공화인민당(CHP) 케말 크르츠다로울루 대표는 25일 “서너 곳에서 파일을 확인한 결과 조작이 아닌 걸로 판명됐다”며 “총리는 사퇴하든지 헬기를 타고 도망가라”고 압박했다. 반면 에르도안은 이날 녹음 파일이 날조되고 편집된 것이라며 “총리를 겨냥한 용납할 수 없는 반역적 공격”이라고 말했다.

 에르도안의 통화 녹음 파일이 공개된 것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 5일엔 야당 대표의 발언을 중계 중이던 방송사에 보도를 중단하라고 요청하는 녹음 파일이 공개되기도 했다. 당시엔 에르도안이 통화 사실을 인정했다. 서울 주재 터키 지한통신사의 알파고 시나시 기자는 “이번 파일 속 아버지와 지난번 파일 속 에르도안의 목소리나 말투가 같다”며 “실제 통화가 유출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어떻게 도청해서, 누가 유출했는지도 관심이다. 에르도안 측은 야권과 결탁한 수사팀이 흘린 것으로 의심한다. 특히 미국에 망명 중인 정적이자 이슬람 사상가인 페툴라 귤렌(73)을 배후로 본다. 터키 검경과 사법부에는 귤렌 지지세력이 대거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에르도안은 2012년 1월 총리 집무실에서 도청장치가 발견되자 자신과 가족들이 지속적으로 감청당해 왔다고 주장했다. 친정부 성향의 일간지 2개사도 24일 검경이 총리를 비롯해 장관·의원·언론인·학자 등 수천 명을 3년 이상 감청했다고 보도했다. 에르도안 정부는 비리 수사가 시작된 뒤 사법부에 행정부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법안과 함께 정부의 인터넷 통제를 강화하는 법안을 강행 처리했다.

 파일이 공개되자 이스탄불과 수도 앙카라 등 주요 도시에선 집권당의 부패를 비판하고 총리 퇴진을 촉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터키 반관영 아나돌루통신은 25일 녹음 파일과 관련해 검찰이 조사에 착수했다고 전했다.

강혜란 기자

◆레제프 에르도안=1954년 생. 이스탄불 시장(1994~98년)을 거쳐 2001년 온건이슬람계 정의개발당(AKP)을 창당했다. 2003년 총선 승리로 총리에 취임한 뒤 2011년 6월 총리 3선에 성공했다. 취임 후 10년간 높은 경제성장률(연평균 7.3%)과 이슬람과 민주주의를 결합한 정치체제를 확립해 터키의 국부인 케말 파샤(1881~1938)에 비견되는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이후 이슬람 권위주의를 강화하고 지난해 탁심광장 반정부 시위를 강경 진압하면서 거센 국민적 저항에 부딪혔다. 에르도안은 연임을 제한한 당규에 따라 오는 8월 대선에 출마할 예정이었다. 최근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당규를 바꿔 총리 4선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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