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아르헨티나」의 피혁가공업자 한씨 3형제(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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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붸노스아이레스= 김재혁 특파원】서울에서 지심을 향해 곧장 파고들면 남미「아르헨티나」수도「붸노스아이레스」에 이른다. 시차는 꼭 12시간. 지구의 저쪽 하늘밑에서 우애로 뭉쳐진 한씨 3형제는 오늘도 부지런히 뛰고 있다.
모이기만 하면 흩어지고 형제사이라 해도 돈 문제가 관련되면 흔히 헐뜯는 세태에 비춰 보면 한영찬(37), 영천(34), 영주(30) 3형제는 똘똘 뭉쳐진 힘만으로도「아르헨티나」의 1천7백여 교민사회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케이스」로 손꼽히고 있다. 또 30대의 정열과 힘이 이질사회를 개척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작년 한해 순익 10만 달러>
현재 한씨 형제가 하는 일은 가죽을 가공 처리하여 남자용 고급혁대를 생산하는 것.「붸노스아이레스」시내에만도 1백여 개소의 가공공장이 있지만 동양인으로서는 이들이 유일하다. 「파고다」(PAGODA)란 한국상표를 붙인 혁대는 시내 번화가의 고급 양품점마다 진열되어 있으며 도매시장을 통해 지방에는 물론 이웃「파라과이」와「브라질」에 까지 진출 돼 있다.
『가죽끈이 이곳 사람들의 허리 께를 죄어들 듯 우리형제가 강인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맏형의 자랑이다.
한씨 3형제가 지난 한해 동안 시장에 판 혁대는 5만여 개. 도매 가격으로 따져 1백50만「페소」(약 15만「달러」)로 순익은 10만「달러」에 이르렀다는 것. 이들이 가죽제품에 손댄 것은 거의 무진장한 재료를 싼값에 구할 수 있고「아르헨티나」사람들이 유행 따라 양복·구두 등을 자주 갈아입는 소비성향이 높다는 점에 착안했기 때문이었다.
「아르헨티나」의 국토는 남한의 28배에 가까운 2백79만여 평방㎞에 인구는 고작 2천5백여 만명(인구밀도 7·1명). 서기 2천년까지 인구를 5천만 명으로 끌어올리겠다고 피임기구 판매를 법적으로 막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팜파스」(대원)에 목장이 널려 있어 방목되는 소(우)는 5천5백여 만 마리. 소 한 마리가 최저 3천 평의 초원을 차지하고 있으며 인구 1명당 소 2마리가 넘는 꼴이다.
이 때문에 가죽원료가 풍부하여 가죽의류·구두·「핸드백」·혁대등 가죽 가공품의 생산이 엄청나다. 사방 1m짜 리의 가공된 가죽 값이 10「달러」정도로 혁대 28개를 만들 수 있어 도매가격으로 84「달러」어치. 거의 8배로 튀겨지는 셈이다.

<처음 채소장수로 숱한 고생>
한씨 3형제가「파고다」회사를 차린 지는 겨우 2년6개월 남짓하다. 지난 67년 2월17일「붸노스아이레스」에 상륙하여 5년 반 동안 채소장사와 식료품 가게를 하면서 숱한 고생을 한끝에 이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여느 이민 교포처럼 고생을 했지만 다만 젊었기 때문에「사는 재미」로 받아들였고 새로운 환경에 비교적 빨리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외향적 성격 탓이라고 했다.
한씨 가족이「아르헨티나」로 이민한 것은 우연한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올해로 환갑을 맞는 아버지 한석건씨는 평남 순천에서 월남하여 인천에서 대륙상회라는 조그마한 점포가게를 열고 있었다. 설탕·밀가루·세탁비누 등을 갈아 밥술을 먹을 수 있을 정도였고 장사밖에는 모르는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아들 3형제가 탈없이 자라는 것 뿐.큰 성공보다도 우애 있게 오순도순 살기를 바랐다.
3형제는 학교공부보다 운동을 좋아했다. 맏아들 영찬씨 만 하더라도 중학교 때부터「레슬링」을 시작, 체육 특기 생으로 D고교와 K대학을 졸업했다. 18살 때 한국자유형 선수권자가 되기도 했으나 끝내 계속하지는 못했고 제대 후 아버지를 도와 장삿길로 들어섰다.
한씨는 아들을 인천시내 일용잡화 친목회에 가입시켜 장사하는 안목을 넓히도록 도와주었다. 영찬씨도 딱딱한 학교공부나 사무원 생활보다는「잠바」차림으로 뛰어다니는 일이 더 적성에 맞았다. 장사는 평탄한 것만은 아니어서 해마다 부담해야 하는 세금도 높아지고 때로는「나리」들의 등쌀에 시달리기도 한다.

<「구류7일」이 이민 계기>
65년 12월 어느 날 한씨는 가게 앞에 물건을 쌓아 놓고 팔았다는 이유로 경찰단속에 걸려 경범으로 구류7일을 살게 됐다. 이웃 가게에서도 으레 그렇게 해 오는데 유독 한씨만 걸린 것은 어쩌면 재수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으나 살아가는 요령이 미숙했기 때문이었다.
살려고 애써 온 가족들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고 원망하는 마음이 앞선 것도 사실이었다.
마침 영찬씨가 서울시내에 물건 사러 갔다가「브라질」의「산타마리아」농장에 이주할 희망자를 모집하는 것을 보고 바로 신청서를 냈다. 가족 중 어머니 이양녀씨(62)만 빼고 모두 이민에 찬성했지만 이씨는『이민가면 아들 1명이 죽는다』는 점괘를 내세워 끝까지 반대했다. 설득도 막무가내. 할 수 없이 꾀를 쓰기로 했다. 다른 점쟁이를 찾아가 대길할 것이라는 점괘가 나오도록 꾸며 이씨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이민가족은 l인당 2백「달러」를 정착금으로 소지할 수 있었다. 재산을 정리하여 바꾼 6천「달러」로 배 삯 2천「달러」농지대금 2천「달러」를 치르고 1천「달러」를 휴대용 녹음기 속에 감춰 66년 12월17일 부산에서 이민선에 올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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