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 좋은 책] ③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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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잔차키스는 … 카잔차키스는 20세기 그리스문학을 대표하는 문호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서구 문명과 문학의 요람인 그리스에서 문학이 부활했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렸다. 카잔차키스는 크레타섬 최대 항구인 헤라클리온에서 태어나고 묻혔다. 1957년 한 표 차이로 노벨 문학상은 알베르 카뮈에게 돌아갔다. 그의 대표작은 호메로스의『오디세이아』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3만3333행으로 된『 오디세이아』(1938)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모두 다 너무나 훌륭한 덕목이다. 하지만 사주학(四柱學)에 따르면 사람마다 이 덕목들이 넘치거나 부족하다. 개인도 조직도 인이 지나치건, 의가 부족하건 … 힘들다. 사주학의 목적은 미래를 예견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균형을 찾는 법을 제시하는 데 있다. 예컨대 인이 지나친 사람은 신의(信義)의 기운으로 인의 기세를 꺾어야 한다. 의가 부족한 사람은 신의(信義)가 필요하다.

국가와 사회, 이론과 실천 사이에도 ‘균형의 복원(rebalancing)’이 필요하다. 정책결정자에겐 용감함과 신중함 둘 다 필요하다. 문명과 야만 사이에도 균형이 필요하다. 야만을 포용하지 못하는 문명은 곧 사라질 늙은 문명이다. 돈키호테 혹은 햄릿만 있는 조직은 반드시 망한다. 직장일과 가정 모두를 포기하지 않고 좋은 직장인, 좋은 엄마가 되는 데 필요한 것도 균형이다.

서양의 철학과 문학에서 단골 주제는 이성·논리·질서·사색을 표상하는 아폴론과 본능·감정·무질서·행동을 대표하는 디오니소스 사이의 대립 구도다. 개인 차원에서도 사람은 아폴론 아니면 디오니소스 성향에 더 가깝다. 아폴론도 디오니소스도 모두 좋은 생활 방식을 제시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양쪽 성향이 다 있는 게 좋다. 아폴론 기질만으로도 이미 성공한 당신. 만약 더 큰 성공을 꿈꾼다면 디오니소스 기질을 보충하는 게 필요할지 모른다.

『 그리스인 조르바』의 영문판(왼쪽)과 한글판.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골격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을 각기 상징하는 두 인물이 1년여 함께 떠난 여정 이야기다.

여자만 ‘나쁜 남자’ ‘위험한 남자’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동성 간에도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30대 중반인 이 소설의 화자(narrator) 바실(아폴론을 상징)은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는 독서광 지식인이다. 일탈이 뭔지 모르는 ‘우등생’이다.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에 대한 책을 읽는 것’ 둘 중에 하나는 선택하라고 한다면 바실은 책을 선택한다. 그는 폐광이 되다시피 한, 상속받은 갈탄 광을 되살리기 위해 크레타로 갈 참이다. 어부들이 폭풍우를 피하고 있는 피레우스 항구의 한 카페에서 조르바(디오니소스형)를 만난다.

바실은 조르바에게 흠뻑 빠진다. 바실에게 조르바는 ‘오랜 허사(虛事) 끝에 드디어 만난 참 인간’이다. 바실은 조르바를 인부들을 다룰 십장이자 요즘으로 치면 비즈니스 파트너로 삼는다. 바실은 조르바를 “보다 원시적이고 창의적인 시대였다면 조르바는 아마도 부족장이었으리라”고 높게 평가한다. 조르바가 21세기 오늘을 산다면 훌륭한 벤처 자본가였으리라.

60대인 조르바는 황홀감, 중독성 있는 쾌감을 선사하는 ‘꾼’이다. 싸움꾼·난봉꾼·술꾼·사기꾼이다. 모험·춤·노래·요리·시 등 각종 잡기에도 능하다. 무엇보다 조르바는 ‘나쁜 사람’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악한을 소재로 한 ‘피카레스크 소설(picaresque novel)’인 것이다. 하지만 조르바는 뻔뻔하면서도 당당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살아서 산더미 같이 많은 일을 했으나 아직도 충분치 않다. 나 같은 사람은 천 년은 살아야 할 것이다.”

조르바가 바실을 사로잡은 비결은 뭘까. 바실은 무엇을 배웠을까. 광인(狂人) 조르바는 “사람은 어느 정도는 미쳐야 한다. 미치지 않으면 밧줄을 끊어버리고 자유를 얻는 일이 없다”고 말하며 바실에게 미쳐야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일깨운다. 조르바에게 삶이란 ‘총체적인 재난’이다. 색욕도 강하지만 우선 삶에 대한 욕구가 강한 조르바는 삶의 흥망성쇠를 흔들림 없이 헤쳐나간다. 비극 속에서 아름다움을, 가난 속에서 풍성함을 발견할 수 있는 낙천적인 인간이다. 우리나라 정치사의 인물과 비교하자면 DJ보다는 YS에 가깝다. 조르바는 말한다. “두목, 세상사는 모든 게 간단한 법이라오. 몇 번을 더 말해야겠소.” 또 이렇게 말한다. “어중간하게 일을 하고 어중간하게 말하기 때문에 오늘 세상이 개판이오.”

『그리스인 조르바』의 핵심 주제 중 하나는 믿음과 종교다. 이런 내용이 나온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거나 매 순간 죽음을 생각하며 행동하거나 어쩌면 결과는 같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점은 지식도 덕망도 미덕도 선함도 승리도 아니다. 보다 위대하고 보다 영웅적이고 보다 절망적인 그것. 성스러운 경외감이다.”

조르바는 물레를 돌리는데 방해가 된다고 자신의 손가락을 도끼로 잘라버린다. 사실 손이건 발이건 눈이건 죄의 원인이 된다면 잘라내라고 한 예수의 말을 상기해야 이 대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선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전의 조건 중 하나는 ‘독자의 삶이 바뀌어야 고전’이라는 것이다. 애독자들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또 읽는다. 아마도 그들은 아폴론적 성향이 강한 연약하고 마음 착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조르바에게서 그들의 롤모델을 발견한다. 실연의 아픔에서 사업 파산의 아픔까지 『그리스인 조르바』는 역동적 미래를 꿈꾸는 사람의 바이블이다.

카잔차키스에게 『그리스인 조르바』를 한 마디로 정의해 줄 것을 요청한다면, 의외의 답이 나올 수 있다. ‘사회주의 지식인의 고통을 드러낸 소설’ ‘불교 소설’이라고 할지 모른다. 왜 그런지 궁금하다면 한번 읽어보시라.

김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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