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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재불 아동심리학자 김양희 박사(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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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폴」과 결혼한 후 그는 공부에만 열중, 심리학을 수료했고 어느덧 대학 졸업반이 되었다. 1년만에 부인이 푼푼이 모은 돈으로 「파리」14구에 세평 짜리 방을 사서 이사했다. 그 동안 부인은 한국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한국대사관의 직장을 잃었으나 곧 새 직장을 얻어 생활은 안정되었다.

<재불 3년간 영양실조로 누워>
그러나 졸업을 눈앞에 둔 그에게 최대의 악운이 닥쳐 왔다. 이때 그는 의과대학에서 생리학과 동물심리학의 학점도 따 심리학 학사가 되기 위한 마지막 「코스」에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운이 없고 어딘지 모르게 통증을 느껴 「파리」대학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다. 의사들도 별 이상을 발견하지 못해 다섯 번이나 왕복했다. 그런데도 통증은 여전해 다시 병원을 찾았다.
마침 바캉스 철이라 「인턴」들은 휴가 가고 과장이 직접 진찰해보더니 신장결핵인데 벌써 균이 많이 퍼졌다고 했다. 과장은 직접 그의 처가에 전보를 쳐서 입원절차를 밟도록 하고 곧 그를 입원시켜 버렸다.
이렇게 해서 병원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이 순간 그에게는 또 하나의 문제가 생겼다. 여권기간이 끝나버린 것이다. 이제 「폴」은 대사비서가 아니라 힘이 없었다.
경찰이 알면 강제 추방당할 신세였다. 그는 병원에서 사유를 써서 여권과 함께 대사에게 우송, 기한연장을 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 여권은 며칠 후 「거절」이란 딱지를 붙여 반송되었다. 다시 호소했지만 이번엔 회답도 없었다.
『그때 난 꼭 죽었을 몸이 되살아났어요. 「프랑스」는 남의 나라 학생이지만 무료로 치료해주고 먹여 주었으며 다른 나라 사람 같으면 대사가 직접 와서 위로라도 해주었을 거예요. 돌이켜 보면 나의 병은 6·25 때의 고생과 도불 3년 동안의 영양실조 때문인 것 같았어요. 그때 나는 언제 경찰이 나타나 쫓아낼지 몰라 안절부절, 병마에 겹쳐 2중으로 고문당하고 있었습니다]
김양희 박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기다리다 지친 그는 당시 대한부인회 부회장이던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랬더니 서울에서 어떤 운동을 했는지 과연 즉효가 있었다. 얼마후 한이란 영사가 서류를 들고 병원에 찾아와 그 자리에서 처리해 주었다.
여권문제가 해결된 뒤 그는 남 불의 「니스」북쪽에 있는 「바로리스」요양원으로 옮겨졌다. 이곳에 6개월간 있는 동안 잊을 수 없었던 것은 「프랑스」인 부인의 간호였다. 그녀는 4주일 일할 것을 3주일 동안 시간의 야근으로 채우고 마지막 1주일은 「니스」에 내려와 그를 보살펴 주었다.

<리오테 병원 과장으로 발탁>
1959년 그는 결국 한쪽 신장을 잘라내는 대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는 다시 유명한 광수의 산지인 「에비앙」에서 요양을 했다. 이때도 부인은 「니스」때와 같이 3천리 길을 달려와 꼭 1주일씩 간호를 해주었다.
신장 한쪽을 잘라내고도 완쾌한 그는 그후 다시 이를 악물고 학업에 들어가 60년 도불한지 실로 8년만에 「소르븐」대학의 심리학 학사가 되었다. 이곳의 대학은 서울처럼 거창한 식이 없고 그냥 대학본부에서 증명서만 받으면 그만. 학사증을 받아쥔 이들 부부는 얼싸안고 엉엉 울었다.
그는 곧이어 「앙리·루셉」병원에 심리 진단관으로 취직하는 한편 동양사회 학회의 번역 관으로 2중 직장을 구했다.
그후 1년만에 벌써 심리진단에 대한 실력을 인정받아 그는 「프랑스」최초의 언어장애자 교정기관인 「리오테」병원의 과장으로 발탁되었다. 「프랑스」심리학계의 권위자인 「자조」교수의 애 제자인 그는 얼마 후 「리오테」병원장 「트마티」박사의 오른팔이 되어 부원장까지 올랐다. 「토마티」박사는 『우는 새의 알을 벙어리 어미 새에 안겨 새끼를 깠을 때 그 새끼는 전혀 울지 않는다』라는 새로운 학설을 연구발표, 선풍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토마티」박사는 『말을 못하는 것은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귀에 들리는 것 만을 말한다』는 이론으로 언어장애자를 청각교정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하며, 전자 인공이를 처음으로 개발했다. 김양희 박사가 이 「트마티」박사의 16명 연구「팀」에 부 책임자로 참가한 것은 물론이다.
당시 그는 「트마티」박사와 함께 TV등에 나가 연설을 했다. 『언어 장애는 모태에서부터 온다. 여자가 직장을 갖고 아기를 탁아소에 팽개치는 것을 현대적 어머니로 자부하며 아기에 매달려 있는 어머니를 바보라고 생각하는 현대여성은 진짜 바보다. 바로 이것이 언어 장애의 원인이다』고 주장했다.

<유명가수도 언어교정 해주어>
그러자 수많은 어린이들이 언어교정을 받으러 몰려들었는데 그 중에는 유명한 가수들도 있었다. 「길베르·베코」 「마리아·칼라스」 「미셸·아그느」 「강·고르」등이 자주 봤다.
왜냐하면 가수들은 항상 노래할 때 악을 쓰게 마련이므로 귀에 보이지 않는 외상이 가해진다. 그래서 청각에 이상이 나타나면 음성이 변해 고은 음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귀를 먼저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수들은 인공 전자이로 주파수를 맞추는 등 정기적 치료를 받았다.
이곳에서 그는 월봉 2천「프랑」을 받았다. 부부가 악착같이 저축, 62년에는 「파리」16구에 12평 짜리「아파트」를 살 수 있었다. 방2개, 부억·목욕탕을 갖춘 집 같은 집을 처음으로 가졌는데 이번에 자기의 저축이 큰 보탬이 돼 남편으로서 최소한의 면목은 선 것 같았다.
이 해엔 미국의 유명한 언어교정기관인 「윌커슨·센터」에서 초청장이 왔다. 그는 「테네시」에 있는 이 「센터」를 1개월 동안 돌아보고 다시 「뉴요크」의 난청「센터」에서 2개월간 시찰 겸 연구를 했다. 이 3개월은 이들에게 결혼 7년만에 처음 맛본 멋있는 밀월여행이었다. <파리=주섭일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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