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파라치, 서울 떠나 지방으로 … 부산 기술전수 학원도 문 열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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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부산시 범일동의 한 스크린골프연습장 직원에게 양복을 입은 한 남성이 접근했다. 자신을 사업가라고 소개한 최경훈(53·가명)씨. 그는 “골프연습장 이용권을 사고 싶은데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직원은 “3개월에 현금으로 35만원이다”며 메모지에 계좌번호를 적어줬다. 직원이 건넨 계좌번호는 연습장 대표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차명계좌였다.

 최씨는 가방에 숨긴 초소형 캠코더로 직원과의 대화를 녹음했다. 연습장을 나온 그는 “골프연습장의 탈세가 의심된다”며 부산진세무서에 신고했다. 차명계좌 사용을 문제 삼은 것이다. 최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서울의 전문가에게 탈세 찾는 법을 배웠다”며 “수도권은 경쟁이 심해 부산·경남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씨가 지난해 7월부터 지난 1월까지 7개월간 756건을 신고해 받은 포상금은 2000만원.

 최씨는 이른바 ‘세(稅)파라치’다. 세파라치란 기업·자영업자의 탈세를 찾아내 국세청·세무서에 신고해 포상금을 받는 사람을 뜻한다. 몰래 숨어서 불법행위를 제보하는 ‘파파라치’에서 따온 말이다.

 최근 수도권 세파라치들이 포상금 경쟁을 피해 부산·경남으로 무대를 옮기고 있다. 심지어 대구와 부산·창원 등에 별도 사무실을 차려 ‘기술 전수’까지 하고 나서 눈길을 끈다.

 서울에서 세파라치 양성 학원을 운영하는 문모(66)씨는 지난해 부산시 영주동의 한 오피스텔에 부산지사를 냈다. 그는 “수도권에 세파라치가 워낙 많아 기술 전수에 한계가 있어 부산에서 수강생을 모집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강료는 월 30만원 정도. 여기에 소형 캠코더 구입비 등을 더하면 100만원 정도 든다. 학원이 가르치는 것은 주로 사업자의 차명계좌를 적발하는 방법이다. 대부분 손님을 가장해 “돈을 입금할 테니 계좌를 알려 달라”고 한 뒤 사업자 이름과 대조해 찾아내는 식이다.

 차명계좌 자료를 세무서에 넘겨 세무서가 탈세 사실을 확인하면 신고 건당 50만원의 포상금을 받을 수 있다. 이 포상제도는 지난해 1월 생겼다. 이 제도 시행 초기에는 주로 ‘아줌마 세파라치’들이 활동했지만 최근에는 정년 퇴직자 등 남성의 활동이 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경남 김해에서 활동하는 정모(56)씨는 “명예퇴직 후 소일거리 삼아 세파라치 활동을 하는데 한 달에 포상금 100만원 정도를 번다”고 말했다. 세무 당국에 따르면 차명계좌 신고는 성형외과와 치과 등 병원에 집중되다 대중목욕탕·헬스클럽·골프연습장과 소규모 물류업체 등 전 업종으로 확대되는 추세다. 대구·경북 100~200명 등 영남권에 수백 명이 활동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세청은 지난 해 차명계좌 신고 217건에 포상금 1억850만원을 지급했다. 국세청 세원정보과 구재완 담당은 “탈세가 적발돼 포상금 지급 요건을 갖춘 것만 이 정도 수준”이라며 “세파라치들이 포상제도를 악용한다고 볼 수 있지만 탈세를 찾아내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말했다.

차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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