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오리 불바람 뚫고 한번에 10t'물 폭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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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일 출동 준비 중인 산림청 항공관리소 소속의 박동희(49) 기장.김춘식 기자

'천년 고찰' 낙산사가 화마에 휩싸였던 5일 오후 3시30분.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낙산사 상공에 차례로 나타난 3대의 대형 헬기가 밑으로 '물 폭탄'을 퍼부었다. 3분여 동안 10여 차례 투하된 물의 양은 약 1만5000ℓ. 길이 1㎞, 너비 50m가 넘는 방화선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면서 불길은 갈 길을 잃고 있었다.

곳곳에서 도깨비처럼 치솟는 불기둥을 잡은 것은 산림청 항공관리소 소속의 헬기 조종사들.

그 선두에는 무려 1만ℓ의 물을 실을 수 있는 S-64E 헬기(일명 에어크레인)를 모는 박동희(49) 기장이 있었다. 이 헬기는 강물이나 저수지 물을 약 1분이면 물탱크에 담을 수 있고, 8단계 조절 밸브를 이용, '물 폭탄'의 양을 조절할 수 있다. 20년 경력의 박 기장 일행은 경북 김천.군위에서 발생한 산불을 진압하고 곧바로 강원도 양양으로 날아왔다.

하지만 낙산사의 상황은 예상 밖으로 심각했다. 이날 바람의 최대 순간 속도는 초속 32m. 이미 군용 헬기의 비행 제한 기준인 20m를 넘어 버렸다. 오전에 잠시 이륙했던 군과 소방본부의 헬기는 몸체를 가누지 못해 진화를 포기해야 했다. 산림청 항공관리소의 베테랑들마저 돌아간다면 양양군 전체가 쑥대밭이 될 위기였다.

한번에 3000ℓ의 물을 실을 수 있는 산림청의 주력 헬기인 KA-32T(일명 까무프)도 불씨를 안고 솟구쳐 오르는 회오리바람에 기수가 휘청거렸다. 이에 박 기장은 에어크레인을 통해 물폭탄을 터뜨리며 불기둥을 뚫기 시작했다. 옆의 헬기 두 대가 각기 다른 세 곳에 융단폭격을 가하며 지원에 나서자 화마는 차츰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갑자기 시커먼 연기가 앞을 뒤덮으면서 헬기는 뒤로 빠져야 했다.

"낙산사의 보물이 타고 있다"는 다급한 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들어왔지만 치솟은 연기 때문에 헬기 운행이 불가능해 '후퇴'가 불가피했다. 1시간 뒤 어느 정도 시야가 트였지만 낙산사는 이미 타버렸다. 박 기장 일행은 다시 물폭탄을 터뜨리며 불길이 인근 시설로 번지는 것을 성공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박 기장 등 산림청 헬기 조종사들은 매년 넉 달간의 산불 조심기간을 포함해 8개월을 비상대기 상태로 지낸다. 다른 기간에는 산악 재난사고나 수해 지원 등에 차출되기 때문에 1년에 가족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은 20일이 채 안된다고 한다. 6일 새벽까지 잠을 설친 베테랑 조종사들은 서둘러 조종석에 앉아 다시 화재 현장으로 날아갔다.

양양=임장혁.강승민 기자 <sthbfh@joongang.co.kr>
사진=김춘식 기자 <cyjb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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