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당연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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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이웃마을에 살고 있는 국민학교 2학년짜리 조카가 왔다.
아빠 엄마가 고모와 함께 숙제랑 하면서 놀다 오라고 하시더라며 내가 공부하고 있는 책상 위에 숙제물을 펴놓는다. 아이들이라고는 없던 집안에 개구장이 녀석이 어찌나 법석을 떠는지 나는 하던 공부를 접고 조카의 숙제들을 보았다. 매일매일하라고 선생님께서 내어 주신 과제물표의 절반이상이 다했다는 표시로 동그라미가 되어있었다.
숙제한 것을 조사해서 틀린 곳을 지적해주고는 곁에 앉아 다시 고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한참 쓰고있던 조카가 『에이 이 연필 못쓰겠다』하며 조그맣게 된 몽당연필을 방 가운데 내던지고 새 연필을 꺼내서 깎는다.
내버린 연필을 보니 꼬마들이 조그만 손에 쥐고 쓰기에는 불편하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과히 짧지가 않았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그 연필을 주워서 끝에 달린 지우개를 떼어내고 다 사용한 「볼펜」껍데기에 끼워서 나의 연습용 연필로 사용했다. 그렇게 하니 지우개가 달렸던 끝까지 아주 쉽게 쓸 수가 있었다. 그런데 조카가 며칠 뒤에 무엇이 생각났는지 갑자기 자기 가방을 뒤지더니 조그마한 연필 하나를 찾아내어 내게 보이면서 『고모, 「볼펜」다 쓴 것 있어요?』하고 묻는다. 『그건 뭘 하려고?』 나는 모르는 체 물었다. 『나도 고모처럼 연필을 끼워서 쓰려고 그래.』 나의 국민학교 시절 수숫대의 속을 칼로 파서 구멍을 내고 그 속에 몽당연필을 끼워서 쓰던 생각이 난다.
요즘 같이 경제불황 속에서는 특히 어린이들에게 아껴 쓰는 습성을 길러 주는 것도 더욱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연필 하나의 3분의1을 아낌없이 버리는 꼬마들…한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을 보여 주는 것이 그들에게는 훨씬 이해가 빨리 가는 것 같다. 고영숙<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번도1리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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