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등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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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역사가 1백년이 넘는 이른바 「고래등집」, 또는 「99간집」은 전국을 통틀어서도 이제 몇 채 남지 않았다.
50년전에 호암문일평이가 서울의 고래등집들을 얘기할 때에도 이미 이름 있는 집들은 거의 모두 헐리고 없었다. 그 뒤 지금까지 남아있는 집들도 이제는 거의 없어지다시피 되었다.
서울에서 제일 컸다는 교동의 김병선 부자의 집도 헐리고 중림동에 있던 약현대신 김재찬의 옛집도 헐렸으며, 창동 서씨의 구기도 헐려 이제는 온데 간데 없다. 유명한 박 정승의 집터에 지금의 창덕 여고가 들어서고, 제동의 칠대 이판 조씨네 옛집도 전동의 두 정승 댁에도 모두 학교가 들어선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이었다. 다만 그 고래등집이 시골에 요즘도 더러 남아있을 뿐이다. 가령 유성룡의 후손이 사는 하의의 유씨, 안동의 김씨와 권씨, 영안의 신씨, 청송 심씨, 또는 경주의 최씨, 양자골에 있는 회재의 후손의 집들이다.
이런 고래등집들은 그 양식이 한결같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바깥마당, 곧 행랑마당이 있다. 그리고 대문 양옆에 줄행랑 방이 여섯 개씩 붙어 있다. 여기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문이 나오고 다시 중문을 지나면 안채가 나온다.
사랑채는 대개 열네간짜리로 되어 있다. 대청이 4간, 뒷마루가2간, 쪽마루, 온돌방이 넷이 있다. 아들이 장성하면 큰사랑 옆에 따로 안사랑 채를 만드는게 보통이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키가 낮은 흙담이 있다. 큰딸이 있는 경우에는 안채 서쪽에 별당을 둔다. 그리고 그 동쪽에는 사당이 있다.
이런 것이 이조 때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인 것이다. 그리고 고래등집은 우리네 조상이 겪어 나간 역사의 조감도나 다름없다.
그러나 새 세법개정과 함께 「고래등집」에서 살기는 힘들어지고 주인들은 집을 내놓기 시작한 모양이다. 영국의 귀족들이 전후에 치러야 했던 시름을 우리네 고래 집주인들도 이제야 겪게된 것이다.
영국의 옛 장원 주들도 중과세며 상속세에 밀려 전후에 영주 관들을 내놓아야만 했었다. 원매자들도 많았다. 미국의 벼락부자들이 몰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장원 주들의 긍지와 애착이 이를 용서치 않았다. 향토민들의 반발도 컸다. 문화재를 보존하겠다는 정부의 뜻도 컸다. 결국 일부는 세금을 면제하고. 일부의 영주 관은 박물관으로 만들어 일반에 공개하여 그 수입으로 유지비에 충당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모든 유서 깊은 영주 관들이 살아남았다. 그뿐만 아니라 옛 장원의 후손들이 대부분 지금도 조상의 옛집에서 살게 되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이화장과 윤보선씨 댁이 면세의 혜택을 받게됐다.
서울 안국동에 있는 윤씨 댁은 우리네 전통적인 정원양식을 갖춘 것으로 유명하다. 문화재와 다름없는 「고래등집」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조치가 있어야할 것 같다. 적어도 고래 등 집은 「사치성 주택」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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