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의 낙서「젊은 울분」만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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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진정한 민주주의는 현자가 독재정치를 하는 것이다』『기성세대는 물러가라. 그대들은 근대를, 우리에겐 현대를 맡기라』-. J 대학교 법대 강의실 책상 위에 쓰인 낙서들이다. 대학생들이 어학 실습실·도서관 열람석·강의실 등에 휘갈겨 쓴 짧은 낙서 속에는 사회 현실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풍자나 삶의 해학이 담겨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상당히 사고적인 「위트」가 번뜩이기도 한다.
심리학자를은 대학 낙서를 학생들의 욕구불만이 정당한 절차로 승화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을 못 받게 돼 그「대용」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소위 낙서심리는 그 원인을 여러 측면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해소책 없는 청년 세대의 욕구 불만의 한 표현 수단인 것만은 틀림없다.
대학생 낙서는 현실풍자·사랑·절망·삶과 죽음에서부터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싶다』『신은 무신론자다』 등 그 종류도 아주 다양하다. 「젊음」과 「순수」를 앞세워 사고하고 행동하는 대학생 세대들이 은밀한 곳에 써 놓은 한 줄의 경고(?) 속에 피력된 그들의 의견은 어떤 것일까.
각 대학신문들에 수집, 발표된 낙서들을 모아 분석해본다.
『현실이 꿈을 배반하는지 꿈이 현실을 배반하는지 분간할 수 없는 시대』 『민의의 항의를 짓밟지 말라』 『세계의 지성은 한국·「스페인」 대학생들의 행동을 주시한다.』 『2불짜리 미제 최루탄』『국가 그 자체도 경제적 이익의 2차적 표현이다.』 『대형 「에프·킬러」(「폐퍼·포그」를 뿜는 신형 장갑차)』-.
이런 류의 낙서에서 오늘의 우리현실상황을 대학생들의 전공과 관계있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는데 이같은 시사풍자 낙서는 주로 법대·문리대·상대 등에 많다. 『사랑은 눈물 속에 피어나 비웃음속에 지는 것』『젊은이의 사랑은 최대의 가식과 위선이다』『우리 모두 사랑하는 법은 배우자. 첫째, 눈을 마주볼 것』『순결은 낭비다』-.
사랑에 대한 낙서가 가장 많고 의견도 여러 가지로 피력되 있지만 의외로 생에 관한 낙서는 별로 없다.
『욕망은 꽃을 피우나 소유는 꽃을 시들게 한다.』『남성이여 긍지를 과대평가 말라』『영어가 날 울린다』 『자장·막걸리가 전부인 대학, 청바지·통「기타」가 전부인 대학, 황금학점·야유회가 전부인 대학, 입대송별 「파티」가 전부인 대학, 명멸하라』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공두래공두거』-.
아무렇게나 써 내려간 대학생들의 낙서는 그 표현이 대부분 거칠고 제멋대로이지만 더러는 과장과 대조를 조화시켜 「아이러닉」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테크닉」도 구사하고 있다.
『고독은 인생의 보증수표』 『나라는 존재는 항상 고달프고 외롭다.-나그네 의식』 『절망을 느껴본 일이 있는지요. 없다고? 망신은 신입니다. 인정하죠』-.
이같이 고독·절망 등을 소재로 한 낙서는 주로 여자 대학에 많다. 현대의 「메커니즘」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군중 속의 고독을 느낀다고들 하지만, 학문과 낭만과 벗들이 있는 「캠퍼스」조차도 그 예외가 아닌 듯.
낙서를 통해 대학생들의 의식구조 전반을 살필 수는 없겠지만, 낙서 형태를 빈 그들의 듸사 표현 속에서 오늘의 청년 세대가 바라는 욕구의 일면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한때 유행병처럼 널리 퍼져 일부 대학에서 낙서 신문까지 내던 대학의 낙서열도 이제는 수그러졌지만 대학 낙서족들의 건필은 여전하다. <이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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