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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행수입 뚫어라 … 현금 들고 007 접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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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18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한 호텔 방에서 미국 병행업체 임원이 이마트 팀에 올가을과 겨울용 의류 신제품이 소개된 카탈로그를 보여 주고 있다. 미국 임원은 “절대 내 얼굴이 노출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해 머리와 손만 나오게 촬영했다. [라스베이거스=문병주 기자]

18일 오후 5시30분(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한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자신이 보낸 스마트폰 문자를 보여달라며, 기자 일행을 확인한 미국인이 조용히 한 방으로 안내했다. 누가 볼세라 방문을 급히 닫고 나서야 서로 인사를 나눴다. 두 칸으로 나뉜 방 하나에는 가방·속옷·물통 등 제품 샘플이, 다른 한쪽에는 의류 카탈로그가 쌓여 있었다. 병행수입 상담이 이뤄지는 이른바 ‘007협상’ 현장이다. 미국인은 병행수입 제품 공급업자이고, 그를 만나 협상을 벌인 쪽은 이마트 협상팀이다.

한국 판권 가진 업체들 몰래 협상

 18∼20일 미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의류박람회이자 병행수입 물품 거래장인 ‘매직쇼’엔 역대 최대인 이마트 팀 10명이 참석했다. 다음 달 정부 규제가 완화되고, 소비자가 선호해 병행수입 제품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지만, 정작 제품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독점수입 업체들이 병행수입 업체들에 물건을 공급하는 공급선을 단속해 제품 공급을 끊어버리기 때문이다. 새 상품을 발굴하는 게 이들의 임무다. 이마트 안영미 부장은 “병행수입품이 인기를 끌면서 한 시즌 지난 제품 말고, 신제품을 구해야 할 필요가 커졌다”고 말했다. 이마트는 이번 출장부터 현금결제를 처음으로 허가했다. 현금 장사를 선호하는 현지 공급업체를 잡기 위한 것이다. 안 부장은 “자금에 구애받지 않고 최대한 많은 제품을 발굴하라는 회사의 특별 지시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미리 주문 안 하면 물량 확보 못해

 안 부장 일행은 이날 오전부터 전시장인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와 만달레이베이 컨벤션센터에서 발품을 팔며 올 유행제품의 트렌드를 살폈다. 하지만 정작 신경은 전날 저녁부터 호텔을 옮겨가며 진행하는 병행업체 3곳과의 ‘007협상’에 가 있었다. 18일 오후에 만난 병행업체는 규모로 미국 동부에서 5위 안에 꼽힌다. 수차례 “판매자의 얼굴이나 이름이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확약을 받고서야 기자도 방에 머무를 수 있었다. 다른 두 업체는 아예 기자를 만나는 것조차 거부했다.

 본격적인 대화는 카탈로그를 보며 이어졌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캘빈 클라인, 휴고 보스 등의 신상품들이 하나씩 소개됐다. 가격과 주문량이 대화의 핵심이었다. 미국인 사장은 “병행수입 제품이 인기를 끄니, 우리도 제품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제조업체들은 예년과 비슷한 수준의 물량만 만들기 때문에 미리 주문해놓지 않으면 물량 확보 자체가 어렵다. 그는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캐나다 구스 패딩을 예로 들었다. 미국 전체에서 4만5000벌이 팔린 반면 한국에서 무려 10만 벌이나 팔려 물량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대화 중간중간 참석자들은 협상 내용이 절대 외부로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이 회사가 한국 업체들에 제공하는 일부 제품은 미국 내에서만 팔겠다는 단서를 달고 있다. 그는 “한국 내 판권을 가진 업체나 ‘○○○코리아’가 소송을 제기하거나 본사에 알려 공급선을 끊어버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물건이 워낙 부족하다 보니 유통업체들이 같은 병행업체와 접촉해 구두 계약했던 물량을 먼저 빼가는 경우도 생긴다.

호텔방엔 샘플·카탈로그 가득

 이날 협상은 3시간 반이 지난 오후 9시가 다 돼서야 마무리됐다. 다음 날인 19일에도 007접촉이 진행됐다. 이번엔 호텔 방이 아닌 전시장 밖에서다. 유명 브랜드의 신상품을 현장에서 직접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장명규 의류 바이어는 “유명 브랜드의 전시부스엔 본사와 거래가 있는 업체만 입장할 수 있어 우리는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장 바이어 일행이 부스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병행업체 직원이 전날 저녁 카탈로그에 나왔던 옷가지들을 잠깐 가지고 나와 실물을 확인시켜 줬다.

 병행수입 제품은 백화점이나 정식 매장보다 30~60% 저렴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다. 이마트는 2009년 매출 26억원 규모로 병행수입을 시작해 지난해 600억원 규모로 23배 키웠다. 올해는 800억원 규모로 늘린다. 이번 매직쇼에는 롯데마트 역시 역대 최대인 8명이 병행업체들을 접촉했다. 롯데마트도 올해 병행수입 규모를 지난해보다 두 배 많은 200억원대로 잡았다.

특별취재팀=문병주(라스베이거스)·최지영·구희령·채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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