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기로 밀어붙인 대역전극 조조연 4단 관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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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백전노장「사까다」선수권자와의 제2국을 앞두고 치훈은 정초 인사도 다니지 않고 연휴를 잠으로만 채웠다. 제1국을 완패한「사까다」가 이번엔 총력으로 나올 것이기 때문에「컨디션」조절이 필요했던 것이다. 6일 밤부터는 일본 기원내「호텔」에서 묵었다.
아침에는 여유를 보였던 치훈의 얼굴은 대국이 포석전을 대용 끝낼 무렵부터 굳어지다 못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백30은 지키면서 동시에 흑의 근거를 빼앗는 좋은 수지만 국후 치훈은 이 수로 31의 우편에 날일(일)자로 두지 못했을까 하고 후회했다.
포석에서 특별한 완착은 없었지만 검토기사들은『흑 유리』라고 판정을 내렸다.
상오11시45분 점심시간에 치훈은 메밀국수 한 장으로 간단히 배웠는데 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옆에서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험악한 얼굴을 하는 것이었다.
바둑은 초반부터 중반 이후까지, 그러니까 저녁 무렵까지 흑이 계속 유리한 가운데 진행됐다. 흑의「선착의 핵」가 충분히 나타난 국면이었다.「사까다」는 바람을 쐴겸 담배를 사러 가는 등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나가다간 지는게 아닌가하고 불길한 생각도 들었다.
백96이 두어진 다음 저녁식사 시간에 들어갔다. 이 큰 끝내기를 치훈이 먼저 할 수 있어서 반면은 비로소 팽팽해졌지만 그래도 흑이 약간 유리했다. 아침·점심이 적었던지 치훈은 고기와 야채를 볶은「스태미너」정식을 들었다. 저녁을 먹는 그의 얼굴은 아직도 험악하기만 했다.
확실히「사까다」는 형세판단을 잘못한 것 같았다. 평범하게 둬서는 모자란다는 잘못 계산했는기 흑105로 우변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무리수를 두지 않고도 백집을 조금씩 파괴하면 이길 수 있는 국면이었다.
결국 흑105는 결정적인 패착이었고 또 조급하게 명을 재촉한 자멸수였다. 치훈으로서는 이 수가 전 국면 중 처음 온「찬스」였다. 「찬스」에 강한 끈질긴 치훈이가 이 승기를 놓칠리 없었다.
백124에 이르러 나는 치훈이가 이기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밤 9시쯤 백140을 두었을 때 치훈이는 제한시간 6시간 중에서 마지막 10분을 남겨놓고 초읽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승세가 굳어 이후 1백여 수를 더 두었지만 치훈은 마지막 3분을 남겨놓을 때까지 잘 싸웠다.
결국「사까다」9단은 이길 수 있는 바둑을 지고 말았다. 역전 당한 원인은 첫째 형세판단을 그르쳐 너무 깊이 뛰어든 점과, 둘째 치훈이가 끈질기고 미세한 바둑에 강해 더 많이「리드」하려다가 오히려 당하고 말았다.
『「사까다」의 말은 죽지 않는다』는 신화를 남긴 그「사까다」의 대마를 치훈은 제1국과 2국에서 두번씩이나 때려잡았다. 치훈은 대세 판단과 수 읽기가 정확하고 주로 반집 차로 이겨내는데 뭐가 있다.
이번 바둑도 치훈은 길게 끌고 가려고 한 반면 치훈의 바둑을 많이 연구했을「사까다」 는 그런 접근 전에는 자신이 없었던 모양인지 모르겠다.
이제 16일의 제3국이 남았다.
치훈은 남은 시간 중 한판만 이기면 일본 기원 선수권을 딴다. 더구나 제3국은 흑 차례기 때문에 더욱 유리하다. 제1 ,2국에서의「페이스」만 유지해주면 선수권 쟁취는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만이나 방심은 금물이다. 바로 지난기에서 치훈의 선배며「기다니」문하 3층 사의 한 사람인「가도」(가등정부) 8단이 역시「사까다」에게 도전했을 때 먼저 2승을 하고도 다음 세판을 내리 져 나가떨어진 일도 있다.
치훈의 제3국「사까다」와의 싸움이 아니라 그 자신과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이 판만 이기면…』하는 욕심이 마음속에 있다면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 남은 세만을 다진다는 예상외의 기적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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