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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6)제42화 주미대사시절(9)|<제자 양유찬>양유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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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제네바 정치회의>
1954년4월27일-. 유서 깊은「제네바」의 옛 국제연맹건물「파레·드·나숑」회의실. 첫 발언자로 나선 변영태 외무장관은『중공은 차제에 맹세하고 한국으로부터 철병을 단행해서 선린정책의 실증을 보여준다면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공산측은 지금도 정전협정을 무시해가며 군비를 강화하고 있다』면서 공산측을 규탄했다.
뒤이어 등단한 북괴외상 남일은『조선통일의 방법으로 모든 외국군대는 6개월 안에 철퇴하고, 남북조선의 대표로 전 조선위원회를 구성, 완전합의하에 선거법을 재정해서 총선을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한국휴전 후 한국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모인 역사적인「제네바」정치회의에서 남북이 대결한 것이다.
「제네바」정치회의는 휴전협정(제60조)의『휴전 후 3개월 안에 정치회의를 열도록 한다』는 규정에 따라「유엔」총회의 결의와 미·영·불·소 4개국의 합의로 열렸다.
회의에는 변영태 외무장관을 수석대표로, 내가 차석으로, 그리고 임병직 대사·홍진기 법무차관·이수영 외무부정보국장·최정자 교수 등 8명의 대표단(이밖에 속기사·타자원 등 2명의 수행원)이 참석했다.
나와 임 대사는 본국으로부터 훈령을 늦게 받아 본국을 들르지 못하고 곧장「제네바」로 가서 대표단에 합류했다.
「제네바」회의는 그 해 2월 독·오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베를린」에 모였던 4대국 외상이 의견을 모아 열기로 했었으나 우리 정부는 한국의 동의 없이 한국문제에 대한 정치회의를 개최키로 결정한 점을 미국에 항의하고 불참키로 했었다.
그러나 미국무성에선 한국대표가 불참하면 한국에 대한 국제여론이 나빠질 터이니 참석해달라고 나에게 여러 차례 종용했다.
그러고는 따로 이 대통령에게도 졸랐기 때문에 우리 정부는『시간낭비의 마지막 기회』라고 선언하고 참가했다.
회의장소로는 처음「샌프런시스코」「호놀룰루」「홍콩」「뉴델리」「판문점」등이 거론됐었다.
참가국은 남아연방을 제외한 참전 15개국과 북괴·중공·소련 등 모두 19개국.「덜레스」미 국무장관·「이든」영국외상·「비도」불 외상·「몰로토프」소 외상·주은내 중공외상 등 당대의 외교 거물들이 한자리에 대좌했다.
참석한 대표수는 미 80, 소 2백, 중공 3백 등 모두 1천명에 가까운 숫자였다.
북괴측에선 외상 남일을 수석대표로 1백여 명의 대표단이 나와 회의장 근처 1만평이 넘는 호화판 별장을 빌어 잡았다.
그들은 미모의 여자수행원까지 데리고 와 매일 밤 별장에서 각국 대표들을 초치, 미인계「파티」를 열었다.
중공대표단도 대단히 큰 별장을 빌었고, 소련대표단은「호텔」전체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북괴대표들은 혼자 다니는 법이 없었다. 꼭 다른 사람이 미행했다. 중공측은 파수병·요리사·의사 등을 본국에서 데리고 왔는가 하면 소련대표들은 도청을 두려워서인지 몇 만「달러」를 들여「호텔」벽을 개조하는 소동을 벌였다. 기가 찬 일이었다.
우리들은 늦게 도착한 탓으로 좋은「호텔」을 잡을 수가 없어 미 선박회사 사장이 주선한「호텔」방에 투숙했다.「덜레스」장관·「로버트슨」차관보 등 미국대표들도 우리와 같은「호텔」에 들었다.
세계의 관심이 쏠렸던 국제회의였기 때문에「제네바」엔 근 1천명의 보도진이 모여들어 붐볐다.
특기할 일은「제네바」회의에서 한국어가 공용어의 하나로 사용됐다는 사실이다.
아마 한국 밖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한국어가 공용어로 채택된 것은 이 때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통역은 처음 최 교수가 맡아하다가 나중엔 차석 대표인 내가 직접 했다.
6세 때부터 미국에 살아 익힌 영어니 나의 영어구사력은 조금도 불편이 없었다. 그래서 중요한 회의에는 통역의 착오가 없도록 하기 위해 내가 나섰다.
북괴측의 남일은 우리가 제시한「유엔」감시하의 남북한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총선안을 거부하고 계속「전조선위」구성만을 거듭 주장했다.
그래서 하루는 변 수석대표가『그럼 남북한의 대표비율을 어떻게 정할 것이냐』고 묻자 남일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1대l로 하자』고 대답했다.
변 대표가 다시『전체인구의 7분의6을 가진 남한과 7분의1을 가진 북한이 동수로 대표를 구성한다는 것이 사리에 맞는 얘기냐』고 따졌다. 그랬더니 남일은 더 이상 대꾸를 못하고 얼굴을 붉힌 일도 있다.
변 대표는 이어서 유명한 통한 14개항을 제시했다.
이 14개항은 홍 대표가 마련해온 7개항에 덧붙여서 우방과 협의 후 내놓은 방안이다.
변 대표는 서울에 연락해본 후에 발표하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책임은 내가 질 터이니 우방 대표들과 합의한대로 밀고 나가야한다』고 주장해서 서울과 협의 없이 공개했다.
우리는 당시 주「제네바」미국대사관 통신시설을 이용했다. 그러나 본국정부와 연락이 신속히 안돼 현지 판단에 따라 임기응변을 적절히 하면서 회담을 진행하는 일이 불가피했다.
결국 이 대통령도 우리더러『잘했다』고 칭찬하는 전문을 보내왔다.
회의를 마치고 귀국하자 변 외무장관은 국무총리가 됐다. 변 총리는 그 후 나를 만나면『「제네바」에서 양 대사 말을 듣기를 잘했다』면서 회고를 하곤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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