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의 설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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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쓸고 닦고 매일 되풀이되는 주부의 굴레 속에서 새 달력이 어느새 다 떨어지고 한 장이 달랑 남았다. 우렁이가 제 껍질을 벗어날 수 없듯이 오늘도 작은 나의 두 손은 집안에서 바쁘기만 하다.
배추를 다듬는데 첫눈이 펑펑 쏟아진다. 첫눈이 오면 강아지처럼 마구 뛰어다니며 꿈을 키우던 소녀 때와는 달리 김장배추 절여놓은 것이 젖을까 걱정이 태산같다.
「비닐」봉투를 찾느라 다락을 오르락거리며 쿵쿵거리다 하늘을 쳐다보고 눈을 흘기는 주부가 되다니…. 그리고 하필 그 복잡한 김장과 냄새 고약한 콩메주를 쑤어야 되는 이 나라의 여자로 태어났을까. 철학적인 문제로까지 생각이 비약한다.
딸이었을 때의 나는 첫눈을 온몸에 맞으며 마음껏 놀러 다녔으나 어머니로서의 나는 아이들의 빨랫감이 마르지 않을까 봐 걱정이고 낙엽이 떨어지는 풍경을 아무 슬픔 없이 바라볼 수 있게 변모했다. 뿐이랴? 그 낙엽을 모아 땔감으로 이용하는데 더 관심이 쏠린다.
생활은 나에게 낭만을 허용하지 않는다. 올 겨울의 물가고와 연료난은 문학소녀의 부드럽던 감정에 딱딱한「콘크리트」옷을 입혀 놓았다. 지루하고 긴 밤이 지나면 새로운 희망의 아침이 온다고 한다. 이제 75년의 새아침이 저만큼 와있다.
새해엔 주부가 연탄집게를 들고 길거리에 나서지 않아도 되고 아이들과 함께 마음놓고 시 한 줄이라도 쓸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해본다.
희망의 내일이 있기에 어제와 오늘의 고달픔을 사람들은 잘 참아낸다. 또 희망이 있어야 나이를 한살 더 먹는 서글픈 상념을 털어 버릴 수 있기도 하다. <서대문구 홍제동 278-27호> 윤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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